나는 이혼가정의 딸입니다.

계약직

by 아샤


26살, 공기업 계약직이 되었다.

알바인생에서 조금은 사회인으로 다가간 기분이었다. 이백이 넘는 월급이 찍힐 때는 이래서 다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으려 하는구나 깨달았다.

처음엔 비서로 뽑혔으나, 도서관 사무보조로 직무가 바뀌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회사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만들어 개관준비 단계였다. 2만여 권의 책등 표지와 RFID, 태깅 등 모두 내 손을 거쳐 완성되고 서가에 정리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쳐갔다. 단순노동이었으나, 책에 둘러싸여 일하는 게 퍽 기분이 좋았다. 사서님의 도움으로 생소한 엑셀과 한글을 조금씩 배워가며 기업에서 일하기 위한 능력도 늘려갔다. 하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이 항상 맴돌았다. 입시 때처럼 남들은 열심히 준비했는데 나만 준비가 안된 상태로 있는 기분이었다. 각 부서에 배정된 동기들은 그 부서에서 잘만 어우러지는 것 같은데 나만 또 뒤처지는 기분이었다.


동기들 중 우리 부서만 두 명이 배정되었다. 처음엔 동기가 같은 부서이니 좋았다. 같은 부서이지만 근무지가 달라 3층과 9층으로 나뉘었다. 나는 도서관 사무보조, 동기는 비서였다. 사서님 하고만 어울리는 나와는 달리 동기는 부서 사람들과 어울렸다. 부서 사람들도 나보단 동기를 더 편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갈수록 더욱 비교되는 것 같았다. 자격지심인 걸 알았지만 그때는 주임 놈 하나 때문에 자존감이 더욱 바닥을 쳤다. 그 주임은 내가 근무지가 다르니 내 자리로 출근 확인 전화를 했다. 그 주임은 자기보다 직급 낮은 사서님의 출근도 확인했으니, 사실 그 주임 놈이 나쁜 놈이 확실했다. 하지만 사회는 지독한 계급사회였다. 내가 사회에 나와 온몸으로 느낀 부분이었다. 모든 것이 계급으로 나뉘었다. 심지어 같은 직급도 고졸이냐 대졸이냐로 나뉘었고, 더 깊이 들어가면 어느 대학교 출신이냐로 또 나뉘어 같은 대학출신끼리 모임을 만들어 어울렸다. 그러니 나는 그 회사에서 을 중에 을이었다. 회식 때나 점심을 부서 사람들과 먹을 때 주임 놈은 “생각보다 많이 안 먹네요?”라거나 남은 음식 같은 것을 내밀며 내게 먹으라고 했다. 무기계약직 전환을 기대하던 내게 "곧 있으면 나가겠네?"와 같은 묘하게 기분 나쁜 말들은 둘이 있을 때 했다. 본인이 해야 하는 수고스러운 일을 자연스럽게 내게 넘겼고, 작업해서 주면 본인이 다시 해서 내가 실수한 부분을 지적하기 위해 9층으로 올라오라는 식이었다. 속으론 ‘내가 해도 지가 또 할 거면 나한테 왜 맡겨?”라거나 “아 저 손놈 저거 왜 저러지?” 등등 많은 악담을 퍼부었으나 입 밖으로는 “아.. 네.. 하하”같은 말들만 나왔다. 무기계약직 전환은 같은 부서 사람들의 좋은 평도 큰 몫을 했기에 담당 주임이 9층에서 나에 대해 안 좋게 말할까 봐 끙끙대며 나를 싫어하는 것을 알아도 참고 알랑방구 못 끼는 성격에 어지간히도 잘 보이려 노력했다. 물론 무기계약직은 되지 못했다. 그 해에 무기계약직 제도가 사라졌다.

계약직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할 필요 없고, 내 일만 잘하면 된다. 그 시간에 내 능력을 더 키우면 된다. 남들 신경 너무 쓰지 마.라고 그때의 나에게 정말 말해주고 싶다.


내 월급에서 30만 원씩은 엄마에게 드렸다. 당연히 그 외에 내게 드는 비용 모두를 여전히 내가 벌어 지불했다. 하루는 동기 중에 한 명이 달에 적금을 얼마나 하냐고 물어서 70만 원이라고 대답하니 왜 그것밖에 못하냐고 이해 안 간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 얼굴에 대고 너는 너희 부모님 집에서 부모님이 보험료, 폰 요금을 내주시고, 밥을 차려주시니까 그 돈을 아껴 적금을 그만큼 하는 거고, 난 그 돈을 다 내가 버는 돈으로 내니까?라고 받아치지 못했다. 분했다. 지금 생각해도 분하다. 온실에서 곱게 자란 티를 유해하게 드러냈다. 그 좋은 환경에서 컸으면서 왜 나랑 같이 계약직 하고 있냐고 받아치지 못했다. 그 후 월급날마다 엄마에게 30만 원씩 보내는 게 억울했다. 또 화살이 엄마에게로 향했다. 자식의 원망을 혼자 받아야 하는 엄마가 안쓰러우면서도 원망할 곳이 엄마뿐이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엄마가 아니라 그 아이를 미워했어야 하는데, 말을 왜 거지같이 하냐고 생각하고 말았어야 했는데, 26살은 아직도 어렸다.


지금 돌이켜 ‘계약직생활이 그 주임 놈만 없었으면 좋았을까?’ 생각해 보면 아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속이 살아나가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 능력은 공부하면 되지만, 마음준비는 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고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돌아보니 제일 필요했던 건 나 스스로를 잘 다독이며 나를 키워나가는 것이었던 것 같다. 망할 놈의 주임 놈은 다른 부서와의 마찰이 있을 때는 이 주임 놈만 한 놈도 없었다. 고려대 법학과를 나왔다더니, 조목조목 따져대는 데는 최고였다.



나를 싫어하면 내 인생에서 빼버리거나 더 사랑해버렸어야 했다.



그건 나 스스로가 단단한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이었고 사회생활은 나이가 되어서, 돈이 필요해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되어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참 좋겠다. 마음이 단단하면 무슨 일이든 대체로 잘 흘려보낼 수 있다는 걸 이제사 느낀다. 그래도 계약직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대략 어떤 방향으로 구직활동을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물론 이때 좀 비관적인 면이 짙어진 것도 같다.


2년짜리 계약직은 불안정한 시간들이었다. 여기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지 않으면 다시 알바인생으로 돌아갈 거 같았다. 그렇게 평생을 하루 벌어 하루 살다 돈이 없어 비참해질 것 같았다. 무기계약직이 사라지고, 공무직 시험을 치던 날 정답을 반대로 적었을 때는 진짜 인생 다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이 나만을 위해 무너져주진 않았다. 나 빼고 모두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쉬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에게 주는 보상 같기도 했다. 내가 저 회사에 공무직으로 취직했으면 병이 나서 행복하기 전에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위안이 아니라 진짜 공무직 시험 다 치고 'X 됐다.'라는 생각 다음으로 든 생각이 '아 이제 그 주임 놈 안 봐도 된다.'였다. 세상사 다 이유가 있을 거고 나에게 온 불행은 그저 불행하기만 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부모 탓만 하던 어린애에서 조금은 어른이 되어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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