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 기억 속 아빠는 집이 아닌 밖에서 행복을 찾는 존재였다.
그런 남자의 아내는 홀로 아이들을 감당하며, 남편의 바람과 금전적 피해를 오롯이 견뎌내야 했고, 한탄할 곳이라곤 자식뿐이었다.
이혼이란 한 여자의 인생에 관통하는 구멍을 만들고, 상처가 나고, 아물지 않는 무엇과도 같았다. 속에 화가 쌓이니 뱉어내지 못할 땐 몸에 병이 났다. 엄마가 죽을까 봐 오빠와 나는 엄마의 배와 발을 밤마다 주물렀다. 피가 돌으라고, 죽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엄마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며 기도했다. 나는 정말로 엄마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내 눈에도 엄마는 시들어있었고, 말라비틀어져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내는 사람 같았다.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는 날이 늘어갈수록 내 속에서도 아빠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늘어갔다.
아빠는 나를 매일매일 허기지게 했다. ‘아빠 사랑을 받은 딸들이 남편을 잘 만난다’, ‘아빠 사랑을 받은 여자애들이 남자한테도 사랑받는다’ 같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들을 볼 때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어깃장이 났다. 성인이 되고 남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았을 때 ‘아빠 사랑을 받아본 적 없이 커서 이렇게 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 사랑을 받아보질 못해서 모르는 것들인지, 원래가 모르는 것들이 맞는지 몰랐다.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순간들이 올 때면 나는 시멘트 바닥에 눌어붙은 껌딱지 같았다. 아빠는 엄마에 이어 내 마음에까지도 구멍을 내놓았다.
아빠는 나의 모든 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매 졸업식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아빠를 기대하곤 했다. 동네에 아빠가 바람피운다고 소문이 다 났어도, 아빠가 학교에 와주길 바랐다. 나도 아빠가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보다 성적이 안 좋은 친구도, 나보다 못난 친구도 아빠들이 학교에 왔다. 그게 그땐 그렇게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행동들이 나를 ‘당연히 사랑할 거라는 마음’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 사이 그 어딘가에 세워두었다. 엄마는 확실히 나를 사랑하는데, 아빠는 모르겠어서 미웠다. 그리고 매 졸업식마다 ‘아빠는 나에게 사랑하지 않는다’로 결론 내게 만들었다.
아빠가 ‘미안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다 용서해 줄 거 같아서 절대 사과하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제발 사과해줬으면 했다. 내 여린 시절은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 끝끝내 사과는 듣지 못했다. 한 여자와 두 자식의 가슴에 큰 획을 긋고 아빠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간암이었다. 친할머니도, 고모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는 암선고를 받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아빠의 몸은 노랗게 변해있었다. 그때의 나는 20살이었고, 오빠는 군인이었다. 아빠가 짧게는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하는데 자식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부모와 자식으로 지내온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었기에 우리 사이에는 어색함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죽을 날을 받아 온 아비에게 자식들은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빠는 뿌린 대로 거두었다.
엄마는 아빠가 찾아간 이후 많은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나에게 아빠가 우리 집에 와서 지내는 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었다. “건강한 것 해 먹이면 병원에서 말한 것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고, 민간요법으로 건강한 음식을 먹어서 암이 사라졌다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혼자서 잘해 먹기는 어려우니까..”라며. 길고 장황하며 말들에는 끝맺음이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여린 사람이었다. 그 고생을 시킨 남자를 다시 집에 들이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는 세상 최고 멍청이었다.
엄마에게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싫다고도 하지 않았기에 우리 사이의 암묵적으로 아빠를 집에 들이기로 한 것이었고, 나는 아빠의 병을 핑계 삼아 내 손으로 요리를 해 먹이고 싶었다. 정말이지 요리라곤 근처에도 안 가본 나는 콩나물국 레시피를 찾아 만들어보고 소금국으로 만들었다가 맹탕을 만들었다가 하며 같이 살 날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전에 아빠는 중환자실에 갔다. ‘지주막하출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숨이 꺼져가는 아빠에게 인사를 하라고 해서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사실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나는 아빠의 발만 잡아보았다. 손을 잡기에는 우리 사이는 어색하다 느껴졌고, 그래도 뭐라도 붙잡고 싶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는 오빠와 내가 상주로 섰다. 하지만 친가사람들에게 보모로 잡혀있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혈통이 고매한 집안이었다고 오빠와 나에게 삼베옷을 입혔다. 큰아버지는 오빠와 내 머리를 꾹꾹 바닥으로 누르면서 부모 먼저 보내는 불효자식이라는 소리를 해댔고, 당숙이라는 작자는 엄마가 사나운 여편네라 아빠 재산을 탐낼 거라는 엿 같은 소리를 술에 취해 지껄였다. 울지도 못하고 3일을 밤을 새웠다. 친가 사람들이 오빠와 내가 잠든 새에 죽일 것만 같았다.
밖에서 행복을 찾던 자의 장례식장은 문전성시였는데 빈소에 조문객이 꽉 차 빈 장례식장에서 테이블을 가져와 복도에 펼쳐 손님을 맞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빠의 부조금은 친가 사람들이 다 가져가버렸고, 우리는 아빠의 빚만 떠맡아야 했다. 그 후에도 말도 못 할 정도로 기가 찬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의 친가는 정말 개차반 집안이었다.
아빠 같지 않은 아빠였어도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엄마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거실에 다리미 판이 펼쳐져있었다. 아빠는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나는 문득 다리미 판 위에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와 동시에 몸이 함께 움직였고, 뒤이어 ‘퍽!‘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미판이 부러졌다. 부엌에서 큰 소리에 놀란 엄마가 “무슨 일이야!!”라고 소리쳤고, 본능적으로 엄마에게 혼날 거란 걸 직감한 나는 아빠를 빠르게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아빠는 엄마에게 “다리미판에 올라가고 싶어서 올라갔는데 부러져버렸네?”라고 했다. 아빠는 키가 187cm에 100kg이 넘는 거구였다. 엄마는 그런 몸으로 어딜 올라간 거냐며 엄청난 잔소리를 쏟아냈고, 아빠는 나에게 윙크를 날렸다. 나는 이 순간을 아빠와의 하나뿐인 좋았던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억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우울한 시절이 드리웠던 것 같다. 장례식 동안 울지를 못해 그런가...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 눈물이 툭 하고 흘렀다. 또 어느 날은 아빠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 또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기계적인 나날을 보내다 깨달았다. “엄마도 없으면 나는 진짜 고아다.”
그 후로 정신 차리고 사람답게 살아보자 생각했고, 취업 준비를 해서 공기업 계약직 입사를 기점으로 지금의 직장까지 구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모든 순간들이 선택의 연속이었고, 고등학생에서 젊은 꼰대까지 될 수 있었다.
부의 죽음은 생각보다 큰 상실감과 성장을 동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