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참 듣기도 싫고, 짜증도 났던 그놈의 단어 ’ 이혼가정‘
아빠는 가정에는 전혀 충실하지 못하셨고, 나의 초중고 입학식과 졸업식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동네잔치나 체육행사에는 참으로 잘 참석해 얼굴을 비추는 꼴이 아주 꼴사나웠다. 돈을 벌면 노름을 하거나 음주가무에 흥청망청했고, 생활비니 양육비니 준 걸 못 봤다.
나의 여고시절, 시골중학교에서 그래도 공부 좀 한다했던 내가 역시나 시내 아이들에게는 밀릴 수밖에 없었고, 자존심이 상해 과외를 시켜달라고 하니 엄마는 혼자 벌어 자식 둘을 먹여 살리는 와중에 고등학생 과외비가 벅찼을 것이다. 엄마도 그땐 여자 혼자 몸으로 일을 하며 다정하게 말하기까지는 어려웠으리라는 걸 이제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때는 엄마의 태도가 온몸에 박여 원망이 되었다. 그리곤 너희 아빠한테 전화해서 달라는 던 말이 수치스러웠다. 그 수치를 무릅쓰고 아빠에게 전화해서 퉁명스럽게 꺼낸 나의 수학 과외비 얘기는 엄마에게 달라하라는 말과 끊긴 통화음으로 돌아왔다. ‘동네사람들에게는 그리 돈을 펑펑 쓰면서 자기 자식한테 쓰는 돈은 참으로 아까워하는구나.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해서 똑똑한 여자 인생 힘들게 만들고, 자식 둘에게 상처를 주나’ 싶었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음은 스스로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는 자식을 두고 부모 중 어느 하나 희생해주지 않는 게 억울했다.
엄마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아빠는 아빠 자격 없는 인간이라 그런 줄 알면서도 돈을 주지 못할 거면 관심이나 미안함이라도 비춰주길 바랐었다. 아이의 마음은 그런 것이다. 부모에게 기회를 준다. 기대를 한다. 받은 상처를 혼자 다독이며 지나갈 수 있게 조금의 다정함만 던져주면 받을 텐데.. 부모가 처음인 사람들은 자주 그 순간을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원망이 내리 박혀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반항심이었다. 부모로 인해 무너진 자존감에 객기까지 부렸다. 애초에 대학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이 고등학교에는 오고 싶었고, 여기서도 공부를 잘하고 싶었다. 1등은 못하더라고 상위권에서 머물고 싶었다. 하위권에 머무는 내가 부끄럽고, 선행학습에 학원에 과외를 가는 애들을 보면 심사가 뒤틀리다가 기가 죽어버렸다.
고2 때부터 미술을 배웠다. 없는 살림에 엄마가 영혼을 갈아 넣어 버는 돈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미 대학 생각은 없었다. 내 진로도 몰랐다. 예체능을 더 좋아했다. 미술에 관심도 있었다. 근데 내신과 수능이 발목을 잡았다. 한 번 싫어진 공부에 다시 흥미가 붙기는 어려웠고, 대학 안 가겠다 마음먹으니 한량처럼 그림만 그리는 게 즐거웠다. 대학도 안 갈 거면서 입시미술을 했다. 동질감이 필요했던 건지, 대학생각은 없어도 끈은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들이 즐거웠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미술학원비며 특강비며 재료비가 엄마에게 벅찬 금액이었다는 거다. 엄마의 청춘을 버리면서까지 열심히 돈을 벌어 장작을 넣어 불을 지펴줬는데, 난 수학과외비에 사로잡혀 몰랐던 거다. 그때 알았더라면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진 않았을 텐데, 열심히 대입 준비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아이는 부모의 사랑에 늦은 후회만 하게 되는 것 같다. 10년 뒤에 아는 걸 10년 전에 미리 알고 싶다. 부모와 자식은 시간이라는 놈이 유대에 훼방을 놓는 것 같다. 이 망할 놈의 시간. 이 망할 놈의 타이밍.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때의 나는 조금 더 자존감이 탄탄한 아이로 자랐을까?’
이 생각이 내 뇌를 지배하는 순간들이 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없는 살림에 다 해주고 싶었던 엄마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젊은 날의 엄마가 너무 고생해서 그걸 너무 잘 아는 딸이라 지금까지도 죄스러움을 안고 있는 내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빠가 가정적이었더라면, 생활비만 잘 벌어다 줬더라면, 무책임한 저런 남자가 내 아빠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조금 더 자존감이 높고, 자신감 넘치는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진짜 나도 궁금하다.
이혼가정에서 커서 남들보다 예민하고, 남들보다 자존감이 낮고, 남들보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인 걸까? 나는 모두가 말하는 이혼가정에서 큰 애들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특징들이 보일까 봐 안 그럴려고 무던히 노력하며 살아왔는데..나를 보살피고, 아끼고, 사랑하며 컸는데도 그런 티가 날까? 그들의 가혹한 시선인지, 진짜 나도 그들이 말한 인간으로 커버린 것인지 알 수 없어 아직까지도 걱정하고 있다. 사회생활하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이혼가정에서 큰 티가 나서 이러는 건가? 나부터 돌아본다.
이혼가정에서 자랐다는 건 정말 무시무시한 꼬리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