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혼가정의 딸입니다.

입사

by 아샤


27살 취직했다.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3개월 받다가 같은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공무직 시험 준비하면서 공부했던 것들이 큰 도움이 되었고, 운이 따랐다. 처음엔 ‘정직원이라니... 내가 합격하다니!’ 하면서 잘하고 싶었다.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니 씀씀이가 커지고 적금보다는 소비가 커졌다. 나는 내 또래 다른 애들보다 고생했으니까, 집에 도움 받지 않고 나 스스로 이만큼 해냈으니까 ‘이 정도는 해도 돼!’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내 명의의 차도 사서 타고 다니고,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편했다. 계산할 때 얼마 내야 하나 생각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게 정말 좋았다. 취업만 하면 다 끝인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남초회사에서 일하기란 정말... 토 나올 거 같았다. 부서 여직원 중에 내가 제일 어렸고, 교대근무하는 여직원도 내가 처음이었다. 처음이라 자랑스러웠는데, 나중에는 그게 너무 힘겨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장가 안 간 남직원은 다 엮어댔다. 심지어 40대 후반의 돌싱 선배도 엮고, 50대인 선배랑도 엮었다. 신입 미혼 남직원들이 들어올 때마다 엮어대기 바빴다. 또 여자라 들어야 했던 거지 같은 소리들도 많았다. 선배 한 분이 나보고 “이제 시집만 잘 가면 되겠네? 취집해도 되겠다. 요새 여자들은 좋아. 취집 해서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으니까.”라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댔다. 그래서 나도 “선배님도 사모님 잘 버시니까 일하기 싫으면 그만두셔도 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가 뒤에서 욕을 오지게 먹었다. 내가 한마디 하면 기 쎈 기집애가 되어 그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동기 오빠에게 이런 힘듦을 토로하니 “일이 편하니까 입이 바빠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앞에 걸어만 가도 너는 이슈고”라고 했다. 억울한 소리인 동시에 납득이 가는 소리였다. 피할 수 없는 포지션에 놓여있었다. “우리를 위해서 화장 좀 하고 와”라는 소리도 들었고, 나보고 혼자 커피 타 마신다고 살찐다며 사람들 앞에서 계속 뭐라 하길래 대꾸를 안 했더니 불려 가기도 했다. 내가 “제가 선배님 딸이라고 생각하셨어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어요?”했더니 “여기서 내 딸 얘기가 왜 나와? 내 딸은 애초에 그런 소리 듣게 안 굴어.”라고 했다. 혼자 커피 타마신 게 이런 소리 들은 일인가? 아빠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남초 회사는 일진 무리가 있는 학교에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약자였다. 노조에서도 소수인 나의 목소리보다는 다수인 남직원들의 목소리가 더 우선이었다. 여직원 화장실에 대해 건의한 지 4년이 지나도록 여자화장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을 해야 하는 게 눈치 보였지만 나중엔 화가 났다. 이건 뭐 소수의 의견이나 편의를 위해 한 번을 움직여주지 않으니 미안함도 사라졌다. 직장 내 괴롭힘과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대안들이 많이 생겨났다 해도 실상은 여전히 참고 버텨내야 함의 연속이었다. 중요한 업무에선 여자라 힘들 거라며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배려라며 배제되었다. 강제로 배제당하고 다른 동료들에게 욕은 내가 먹었다. 힘든 일은 여자라는 핑계로 안 하려고 한다고. 더 문제는 내가 고분고분 말하는 대로 듣고 있을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여자 후배가 생겼을 때는 알 수 없는 책임감까지 더해졌다. 회식자리에 가니 개가 되는 사람들이 많아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남자 선배들은 술이 들어가니 오빠병이 오는 듯했다. 20살은 차이 나는데 “오빠가~”라며 말을 할 때 본인이 오빠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알아서 찾아와 술 한잔 따르지 않는다며 회식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불려 가 한 소리 듣기도 했다. 알아서 애교를 떨라는 거였다. 같은 행동을 해도 나만 그런 소리를 들었다. 그 후 나는 모든 회식에 불참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반복되니 점점 남의 눈치를 보는 일이 잦아지고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면 극도로 긴장하고 예민해졌다.


입사하고 3년이 지날 시점 공황장애가 왔다. 60kg 입사를 했는데 46kg까지 빠졌다. 숨이 턱턱 막혀 과호흡이 오고 그로 인해 몸에 마비가 동반됐다. 갈비뼈가 조여 오고 물속에 빠진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황발작이 오면 용을 쓰니 발작이 끝나면 진이 빠졌다. 나중엔 음식을 씹는 것도 힘겨웠고, 잠을 자는 것도 어려웠다. 심장이 귀에서 뛰고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제일 큰 공포는 그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거였다. 나중에는 사람 많은 곳에도, 협소한 곳에도 잘 못 갔고 출퇴근 운전하다가 공황이 오기도 해서 평소에는 운전을 오빠나 엄마가 대신해 주었다.


이런 힘겨움을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은 이해하지만 당시에 회사 사람들은(물론 마음이 못난 일부 쭉정이들이었지만) 나에 대해 꾀병이다, 쉬고 싶을 때마다 병가 낸다며 욕을 했다. 나는 그렇게 아픈 순간에도 눈치를 봤다. 평일에 바쁠 때마다 휴가 낸다 욕먹으니 평일에 버티고 버티다 주말에 휴가를 냈다. 주말에 휴가를 내니 왜 주말에 일도 없는데 내냐며 놀러 가려고 내는 거 아니냐고 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도 욕을 먹었다. 사택에 살았는데 공황장애에 우울증까지 심해져 친구들이 나를 위해 사택에 와서 같이 잠을 자거나 밥을 먹게 하겠다고 집에 찾아오는 일이 많았는데 그걸 본 회사 후배가 회사 선배들한테 얘기를 했고 그 말에 살이 붙어 나는 아프다는 건 핑계고 친구들을 불러대서 노는 애라는 소문이 났다.


내가 정신병에 걸리다니... 라며 부정의 단계가 있었으나, 노력하면 1년 안에 나을 거란 생각을 했고 사력을 다했다. 심리 상담, 명상 테라피, 요가, 크로스핏, 서핑, 여행, 템플스테이 등등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크로스핏은 처음에 갔다가 박스에 사람이 너무 많아 뛰쳐나올 뻔했는데 필요시 약을 먹고 버텼고 하다 보니 사람 많은 곳도 가는 게 전보다 나아졌다. 서핑은 홀로 바다에 둥둥 떠있는 게 좋았다.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게 너무 힘들지만 어쩌다 파도를 한 번 잡을 때면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도파민이 폭발하는 듯했고, 사람 많은 게 싫어서 새벽에 가면 온 파도를 나 혼자 전세내서 쓰는 거 같은 부유함도 느꼈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해도 회사만 가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내가 병가를 내고 서핑을 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요새 하는 운동 있냐는 물음에 서핑이라고 대답했다가 이런 소문이 돈 것이다. 한 번도 병가를 내고 서핑을 간 적이 없었는데 운동 잘만 가더라며 꾀병이고 내가 약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를 말로 죽여갔다.


그렇게 힘들면 회사를 그만두면 되지 않냐는 소리도 쉽게들 했다. 내가 입사하고 1년 뒤에 코로나가 터졌다. 취업난은 더욱 심해졌고 회사를 그만두면 생활이 금방 어려울 거란 게 자연스레 그려지니 회사에서의 시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컸다. 회사에 다니지 않았다면 회당 10만 원짜리 심리 상담도 받지 못했을 거고, 보험 적용도 안 되는 정신과 진료도 주에 한 번씩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텼고 버티는 동안 몸이 망가졌다. 면역력이 엉망이 되었다. 툭하면 온몸에 염증이 폭발했다.


입사하고 좋은 일보다 최악의 나날들이 더 많았다. 몸이 아파질수록 ‘아빠엄마 다 있는 집에, 돈 걱정 없었으면 이 거지 같은 회사 바로 그만뒀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가정환경을 탓했다. 내가 탓해야 하는 건 못된 심보의 인간들이었는데 거기에는 겁을 내고 또 제일 만만한 엄마가 미웠다. 아빠 빚을 왜 상속받아서 엄마의 노후를 걱정하게 만들었나 하는 원망이 앞섰다. 엄마의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결혼을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고, 결혼해서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더 생기는 것도 무서웠다.


이러한 생각들을 다 흘려보내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여전히 여러 원망과 억울함이 올라오지만 이제는 대체로 ‘뭐 어쩌겠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전보다 남들의 시선에 덜 신경 쓰는 듯하다. 물론 신경을 아예 안 쓸 순 없다. 그냥 내가 그렇게 태어났거니 한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생기고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병원에 다닌다. 면역력이 한 번 바닥을 치니 노력을 해도 예전의 건강을 되찾지는 못해 염증에 취약한 몸이 되었다. 약은 알약의 개수와 용량이 줄었다. 완치는 안 되었지만 전보다는 나아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고 여전히 사람들이 무섭다. 저 사람도 뒤에서는 날 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도 먼저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공황장애인 걸 모른다. 공황발작도 안 온 지 1년 정도 된 듯하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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