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혼가정의 딸입니다.

대학생

by 아샤


결국 대입에 실패했다.

재수를 하진 않았다.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고등학교 진학 후 내가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또렷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수시는 떨어지거나 예비번호를 받은 상태였고, 정시를 도전하기엔 준비한 게 없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겠다 마음먹었을 즈음 엄마가 방통대라도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비가 싸고, 출석일수가 적어서 좋았다. 처음 학교에 간 날 나의 동기들 중 20살은 나 하나뿐이었다. 다른 과에 비해 만학도 분들이 더 많았다. 그들의 열정에 대한 감탄과 친구들과는 확연히 다른 대학생활에 대한 실망감이 공존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나는 고등학교 친구가 사라졌다. 자존심이 상해 그들과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낄 무리가 아닌 곳에 내가 톡 떨어져 이방인처럼 지내다가 아니나 다를까 하고 그게 티가 나버린 기분이었다. 나의 대학 동기들은 동네 아저씨, 옆집 아줌마 같았고 세대가 다른 농담은 어색했다. 일 년에 출석하는 날은 열손가락 정도라 고등학생 때와 달리 이번엔 잠깐의 시간만 이방인처럼 보내면 되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은 알바를 하며 지냈다.

대학 등록금만 주고 그다음부터는 알아서 생존하라는 엄마의 교육관으로 인해 일을 해야 했다. 교육관이었던 건지, 고달파 어쩔 수 없었던 건지는 아직도 제대로 물어본 적 없다. 물론 엄마에게 ‘재수가 하고 싶다, 용돈 좀 달라’고 했다면 등골이라도 빼서 주셨을 거란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삐뚤어진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불쑥 올라오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20살 초반은 아직 성인이라고 불리기엔 치기 어리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냥 ‘오늘부터 넌 성인이야 ‘ 도장 쾅! 쾅! 했으니 성인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어린이 같았다.

알바를 하루에 3개씩 하던 때도 있었다. 나는 성실했다. 남들보다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다. 누군가 주는 간식에도 행여 게걸스럽게 행동할까 조심했고, 다 같이 누군가를 왕따 시키자고 해도 동참하지 않았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티가 난다고 할까 봐. 어린아이가 충동성을 스스로 자제하려 노력하는 행위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혼자 그렇게 눈치를 보며 컸다. 그 덕에 알바를 할 때면 사장님들의 신뢰를 받았다. 카운터나 돈에 관련된 일을 나에게 쉽게 맡기셨다. 본능적으로 돈 가지고 장난칠 타입이 아니란 게 보였던 걸까? 그렇게 알바를 해서 월세를 내고 생활비와 공과금, 적금 등등 나라는 인간에게 들어가는 모든 돈을 벌었고, 지불했다.


다른 친구들은 자격증을 따고, 어학연수를 갈 때 나는 알바를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 알바신세를 면치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중반을 달려갈 때였다. 조급함이 온몸을 휘감아 잠도 못 자게 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해야 안정적인 수입을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이때에 가장 깊고 방대하게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민하다 네일자격증을 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손으로 뭔가를 하는 걸 좋아했으니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알아보니 학원 수강료가 만만치 않았다. 성인이 되고 엄마에게 처음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엄마는 차용증을 쓰자고 했다. 어른이 되었으면 돈거래에 대해서 똑바로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차용증에 도장까지 찍어 돈을 빌려 자격증을 땄다. 결론적으로 나는 네일숍을 차리지 않았다. 그 후 공기업 계약직에 붙어 본가로 다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내 인생을 내가 정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기 시작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면에는 아빠의 죽음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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