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사건은 밤9시께, 벌어졌다. 나는 이직 3일차에 놀랍게도 야근 중이었다. 중요한 의회 업무보고 시즌인지라 부서별로 불꺼진 사무실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아직 업무숙지도 덜 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채 급하게 만든 보고문서를 들고 국장실에 갔다.
국장실은 거의 수능시험을 코앞에 두고 벼락치기 하는 고3 교실이 따로 없었다. 회의테이블에는 부서별로 올라온 서류더미가 공포스럽게 쌓여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저 많은 자료는 그러니까 정확히 실무자의 피와 땀과 눈물이다. 일년치 사업을 고작 한두장으로 줄이면 끝나는 게 아니라, 각 사업별 그러니까 더 정확히는 사문서의 동그라미별로 참고자료가 한장씩 붙으니, 그 많은 내용을 추리고 추려 압축하되 혹여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참고자료의 참고자료의 참고자료를 1,2,3,4로 계속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문서는 업무보고의 답변자인 국장이 모두 숙지할 수 있게, 끝없는 스터디와 문서의 수정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엄청난 일을 입사 3일만에 목도하였고,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드디어 내 순서다. 국장님은 빨간색 모나펜을 들고 문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뜯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은 없다.) 문장의 뜻을 모를 리 없겠지만, 나에게 단어 하나하나를 물었다.
'이건 무엇이고, 저건 무엇이고, 그래서 이건 무엇인지...'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보고서류엔 빨간펜으로 도배가 됐다. 한줄씩 찍찍 그어지는 빨간펜이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게" 다시 써오라며 너덜너덜 해진 보고서류가 다시 내 손에 돌아오고 나서야 정신이 차려졌다.
하. 어찌나 굴욕적이던지. 7층 국장실을 나서며,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었다. 그날 사무실을 몇 바퀴 돌고 돌았는지 모른다. 글이라면 그러니까, 나는 어느정도는 자신했다. 글쓰는 걸로 더러 몇 해는 밥벌이를 해왔으며 말보다는 글로 표현하는 게 더 익숙했던 사람이니까. 처참한 기분이다. 사무실로 겨우 돌아왔을 때, 붉어진 내 눈을 보고 다들 무슨 일이냐고 묻고싶은 눈치였다.
"이런 굴욕감 진짜 오랜만에 겪어봐요. 이거 보여요? 국장님이 빨간펜으로 그은거야. 하..."
국장님은 빨간펜 선생님으로 본디 유명하다고 했다. 누구라도 예외없이, 본인 마음에 안들면 빨간펜을 꺼내들었다고 한다. 여긴가, 내 무덤이. 또 다른 지옥문을 열고 드어온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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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그날로부터 정확히 한달동안 특훈 아닌 특훈이 시작됐다. 특훈이라는 말로 애써 포장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숱한 밤들이 지나갔다.
여기는 지옥...아니 그러니까, 행정이다. 행정문서는 그 어디보다 더 까다롭고 예민했으며, 지켜야 할 룰이 분명했다. 그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이니 내 모든 것이든 수용해보겠다, 그런 마음으로 다 받아들였지만, 아니 잠깐만요.
꽉 채우지 않는 문서의 여백을 왜 견디지 못하시는 거죠? 그건, 그것만은 정말 이해가 안됐다.
한장이면 한장(그것도 여백없이 꽉 채운), 두장이면 두장이어야지,
한장반짜리 문서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세계였던 것이다...
내가 곧 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서있자, 과장님이 그랬다.
"문서는 폼생폼사야.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한 눈에 잘 안들어오고 잘 안읽히는 문서는 쓰잘때기가 없어."
그러면서 파일 하나를 열더니, 무려 500쪽에 가까운 파일을 하나씩 넘기며 보여줬다.
"이것봐봐. 나도 지금껏 하나씩 다 모아둔거야. 처음부터 쓰러면 어렵고, 언제 어떻게 가져다 쓸지 모르니까 필요할 거같은 것들은 다 모아두고, 그래도 잘 모르는 건 밥사주면서 익혀온거야. 모르면 배워야지. 별거 아닌거 같아도 문서는 이런게 중요해. 보기좋은 문서는 먼저 손이 가게 돼있다고. 내용의 격을 갖추는 건 중요해."
사실 많이 놀랬다. 깐깐하기 그지없는 과장님이 보여준 파일엔 정말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신세계였다. 본인도 여기서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붙여넣고', 응용해서 쓴다고 보여주셨을때. 아. 과장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뭐라고.
나는 그후로 과장님처럼은 못 되더라도, 문서에 최선을 다해 예를 갖춰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보기좋은 떡이 되보기로 한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리팀도 다같이 노력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쉽게 실수하는 것들을 줄여나갔다. 너무 간단하고 쉬운건데도 그냥 놓치기 쉬운 것들이 있다.
가장 기초적인 폰트크기를 통일하고(본문은 15pt아래는 안된다 어르신들은 15pt), 서체도 통일. 가끔 복붙하다 바뀐 서체를 그대로 들고가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본문엔 휴먼명조체, 참고(*)는 중고딕.
단어가 줄이 넘어가 끊기지 않도록 미세한 자간조절(중간에 꽉꽉 껴서 압사당하기 직전의 글자는 안된다)을 하고, 한장 문서 안에 같은 단어 중복사용 금지. 네이버에 유사단어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바꿔쓰자.
무엇보다 개조식 문장쓰기 훈련. 냅다쓰지 말고, 3단계식 사고(배경-추진상황-향후계획)를 통해 흐름을 정리 썼다. 추상적인 단어도 사용 금지. 객관적이고 정제된 언어 사용을 위해 꾸밈말들은 계속 덜어냈다.
그리고 상대를 고려하며 쓴다. 이 문서를 받는 사람이 누군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썼다.
그 사람이 나만큼 이 사업을 잘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1분 안에 그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꼭 필요한 말만 고르고 골랐다.
이렇게 몇 가지 규칙을 정해놓고 문서를 쓰고 고쳐나갔더니, 훨씬 문서가 태를 갖춰나갔다.
"문서는 폼생폼사야"라고 쿠사리 먹던 과거의 나여,
"문서가 갈수록 좋아진다"고 격려도 받고,
어느날에는 국장님의 빨간펜도 없이 한방에 통과도 했다.
노력하면 뭐든, 지금보다 더 좋아진다는 건 참으로 좋은 말이다.
그 한달은 나에게 좋은 촉매제가 되었다.
단순히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라 여겼던 문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좋은 내용을 추려내는 것 만큼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
며칠전엔 일년전에 함께 일했던 팀원이 잔뜩 술에 취해 전화가 왔다.
이런저런 안부를 전하더니 대뜸 정말 고마웠다고 했다. 일하는 당시엔 어렵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디가서든 문서 하나는 자신있게 쓰고, 칭찬받는다며 그옛날 우리를 괴롭혔던 폼생폼사를 떠올리며 한참 수다를 떨었다.
가끔씩 이렇게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예기치 못하게 들려오는 문서 피드백을 보며
사회초년생들을 위한 문서팁으로 정리해두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