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를 찾아라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양한 인종이 북적이는 공항은 이곳이 베트남의 국제 도시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인천공항이 개항하기 전 90년대의 김포공항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세계 어디를 가든 인천공항 급의 시설이나 서비스를 기대하면 안 된다. 특급의 무언가를 기대하면 실망만 하게 된다. 호치민 시 전체의 시설 평균을 봤을 때, 나름 잘 갖춰진 공항이 아닐까 싶다. 우리 세 남자에게는 이 정도 공항이면 매우 족하다. 애초에 우리 삼부자는 럭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호치민 시는 베트남의 최대 도시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통일이 된 이후 '사이공'이라는 옛 명칭을 호치민 시로 바꿨다. 하지만 현지인들에겐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항공권을 살펴보니 떤선녓 국제공항의 코드도 SGN이다. 오래도록 불러왔던 이름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름을 부를 때에는 대상에 대한 나의 추억과 감정이 담기는 법이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개명을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이름을 바꾼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는 친구가 영 어색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특별히 꼭 새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하지 않으면 옛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나와 우정의 시간을 보냈던 친구는 새 이름 호치민 보다는 추억이 담긴 사이공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사이공 사람들도 분명 그렇겠지.
호치민 시는 16개의 군과 1개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19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사이공강 동쪽의 2군, 9군, 뚜득군을 통합해 새로 개발할 요량으로 '시 안의 시' 개념의 뚜득시로 병합한 모양이다. 많은 여행객들은 호치민의 중심지 1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관광 명소들이 1군에 몰려있기도 하고, 가장 안전한 지역이기도 하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와 아내, 두 아들은 싱가포르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진 후 처음이었다. 그 전의 해외여행은 두 돌도 되기 전이니 싱가포르가 아들이 기억하는 첫 해외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공항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렸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였다. 두 아들을 데리고 밤새 짐을 찾느라 공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분실 신고를 하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땀에 절은 유일한 옷 한 벌을 그대로 입고 싱가포르를 돌아다녔다. 첫날부터 긴장과 짜증이 우리를 짓눌렀다. 저녁나절쯤 공항으로부터 누군가 바꿔간 짐을 찾았다는 이름 그대로 '해피콜'을 받기 전까지는 '무얼 사서 들어가야 내일도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들과 나는 짐을 잃어버리면 어떤 고생길이 열리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삼부자의 첫 미션은 짐 찾기였다.
"아빠, 우리 이번엔 진짜 짐 잃어버리면 안 돼요."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 우리 짐 잃어버리면 수영도 못해."
"근데 여기가 맞아요? 왜 우리 게 안 나오죠?"
"아니야. 나올 거야. 여기가 분명 맞는데..."
슬슬 초조했다. 같은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짐을 찾아 떠났다. 호치민 공항에 착륙한 지 1시간 반, 짐을 기다린 지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비행기의 짐도 나오고 있었다. 혹시 다른 캐러셀에 잘못 올라갔을까 싶어 캐러셀 섹션을 무한 왕복했다. 아버지는 끝에서 처음으로, 나는 처음에서 끝으로. 공항을 뛰어다니는 아빠와 할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비행기의 캐러셀을 지켜보던 초등학생이 소리쳤다.
"아빠, 찾았어요! 저기 나오는 빨간 거 저거 우리거 아니에요?"
더 이상 새로운 가방이 추가되지 않던 텅 빈 캐러셀에 갑자기 빨간 캐리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호치민의 공항 시스템이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 남자는 손바닥을 마주치고 얼싸안았다. 캐리어 하나 찾았다고 이렇게 기뻐하는 여행객은 세 남자 뿐이었다. 같은 성공도 어떤 상황에서 이뤘냐에 따라 그 감흥은 크게 달라진다.
첫 번째 실패는 무용담이지만, 두 번째 실패는 트라우마가 된다. 인생도 그렇다. 제대로 실패를 맛본 사람은 두 번째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 다행히 사이공은 두 번째 실패의 장소가 되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초조해하던 미스터 사이공도 주름을 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 남자는 짐을 찾고 웃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그래, 세상에 짐 찾은 것만으로도 신나는 여행은 없지.' 삼부자 여행은 이렇게 특별하다.
공항에서 몇 가지 할 일을 더 했다. 우선 우리 원정대의 무전기이자 지도가 되어 줄 유심을 샀다. 굳이 한국에서 따로 유심을 살 필요는 없다. 호치민 공항에 내려 가장 싼 곳을 찾으면 된다. 입국 수속장 근처에선 한 시가 급한 사람들을 노려 300,000 VND (15,000원)이지만, 짐을 찾고 여유 있게 둘러보면 30일 무제한 유심이 200,000 VND (10,000원) 정도면 한다. 역시 장소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것은 비즈니스의 룰이다. 한국에서 결제하고 가면 7,000원에도 하지만 수령처가 어딘지 찾는 것이 더 불편할 수 있다.
환전 역시 공항에서 하고 가는 것이 편하다. 우리 삼부자는 공항에서 환전을 못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고생을 만들어 줄지 이 때는 몰랐다. 시내로 가면 더 싼 환율이 있을 것 같지만, 큰돈 바꾸지 않는 이상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믿을만한 환전소가 가까이 없을 수도 있다.
베트남 동은 단위가 매우 크지만,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환산하는 것이 크게 복잡하진 않다. 0을 하나 빼고 반으로 나누면 한국 돈이 나온다. 100,000 VND = 5,000원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된다. (정확히는 그리고 10%를 더해 5,500원이다) 이 방법을 터득하고 난 이후로 우리 원정대의 환율 계산 담당은 1학년 수학 영재가 맡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미리 깔아 둔 동남아시아 여행 필수 앱 그랩을 켜고 첫 숙소를 찍어 잡았다. 여행 책과 베트남 관련 유튜브 마다 택시 사기에 대한 경고가 많다. 아버지의 베트남 탐구 내용에도 당연히 포함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삼부자에겐 걱정이 없다. 여러 내용이 있지만 요약하면 그랩을 타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그랩이 없는 베트남 여행을 상상하긴 어렵다. 그 나라의 사회적 신뢰 지수를 '사기를 얼마나 걱정해야 하는지'라 본다면, 그랩은 베트남의 신뢰 지수를 꽤 많이 올리는 혁신이다.
비나선 이나 마일린 택시만 타라. (인척 하는 택시도 조심)
함부로 지갑을 열거나 큰돈을 줘서 바꿔치기 당하지 마라.
같은 가격에 태워준다는 호객을 무시하라.
웬만하면 그랩을 타라.
그랩 잡는 데에도 우리는 각자의 한몫을 했다. 나는 그랩을 잡았다. 아버지는 짐을 챙기고 주변을 살폈다. 아들은 우리가 콜한 차 넘버를 찾았다. 삼부자는 공항을 떠나 첫 그랩을 잡아 타고 베이스캠프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