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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종일 Oct 22. 2023

5. 헬로, 베트남

Hello Vietnam. 안녕, 베트남


비행기가 흔들렸다. 아들은 무서운지 내 손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


"아빠, 왜 이렇게 많이 흔들려요? 비행기가 떨어지진 않겠죠?"

"당연하지, 우리가 구름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구름을 뚫고 내려오잖아. 구름을 지날 때는 이렇게 흔들려."

"그런데 아까 구름 위에 있을 때도 흔들렸잖아요."

"난기류를 만나면 그럴 수 있어."

"난기류가 뭔데요?"

"어... 공기가 막 움직이는 거야."

"왜요?"

"공기들 온도가 달라서 그럴걸? 찬물하고 따뜻한 물 섞으면 두 물이 막 돌아다니다가 섞이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요?"

"글쎄, 공기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1학년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폭발하는 때다. '왜'의 폭격 앞에 한국인 아빠는 한 없이 무력하다. 문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아는 지식을 모두 끌어 모아야 한다. 'A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B라는 단어를 써도 될까? B가 뭔지 모를 텐데. 일단 B라고 이야기하고 B가 뭐냐고 하면 다시 설명하지 뭐' 따위의 판단을 계속해야 한다. 진땀을 빼며 최선을 다해 설명하다가 슬슬 문답을 끝내야 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네가 생각하기에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다. 최고의 답은 질문이다. 인사 청문회에서야 질의하는 국회의원에게 장관 후보자가 반문하면 질타받지만, 1학년 아빠는 괜찮다. 폭격하는 '왜'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공도 필요하다.


왜의 폭격 속에서도 삼부자가 탄 Vietjet 비행기가 베트남 호치민의 떤선녓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공중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속도감이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극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비행기가 착륙해 땅의 진동이 느껴지면 누군가 나를 여행지의 시공간으로 급격히 빨아들이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엔 베트남 호치민 블랙홀 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 옆에는 사랑하는 노인과 소년이 함께 있었다.


착륙의 안도감을 느낄 때쯤, 비행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슬픔과 청아함 사이 어딘가의 목소리였다. 베트남을 즐기러 온 관광객보다는 애절한 사연을 가진 여행자를 위해 준비된 음악임이 틀림없었다.

Hello Vietnam - Quỳnh Valentine
Tell me all about this name that is difficult to say
It was given me the day I was born
Want to know about the stories of the empire of old
My eyes say more of me than what you dare to say
All I know of you is all the sights of war
A film by Coppola, the helicopter's roar

One day I'll touch your soil  
One day I'll finally know your soul
One day I'll come to you
To say hello... Vietnam


'안녕, 베트남 Hello Vietnam'은 어릴 적 해외로 입양된 베트남 소녀 Pham Quynh Anh 가 베트남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다. 베트남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 속의 헬리콥터 굉음뿐이지만 언젠가 베트남 땅을 밟고, 베트남의 영혼을 알고, '안녕, 베트남'이라고 말하겠다는 소녀의 시다. 정체성의 희구에는 강렬한 힘이 있다. 이 노래는 여행 후 남을 몇 가지 중에 하나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자들에겐 원곡인 불어 버전의 Bonjour Vietnam을 더 추천한다.)


그녀에 비해 나는 베트남에서 찾을 영혼이 없다. 영화 애호가들에게 최고의 전쟁영화로 꼽힌다는 '지옥의 묵시록' 속 베트남 전을 본 적도 없다. 베트남어라곤 Xin Chao (신 짜오 - 안녕하세요) 밖에 모르는 무관심자였다. 나는 그저 70대 아버지의 성실한 탐구생활 속에 끌려 들어온 손님이었다. 그런 내가 마치 꼭 찾아야 할 일생의 보물이 베트남에 있는 것 같은 폼으로 노랫말 속에 젖어 들어 비행기에서 내리고 있다. 그리고 곁에는 나의 뿌리 아버지와 나의 열매 아들까지 데리고 왔다. 그런데 뭐, 아무렴 어떤가. 어쩔 땐 좀 오버스러워야 인생에 새로운 물이 들어온다. 감정 과잉은 창조로 이어지지 않던가. 청년의 오버는 열정이라면, 중년의 오버는 청승맞아 보일는지는 모르겠다.


많은 여행객들이 겨울방학 시즌에 베트남을 찾는 이유는 날씨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많은 나라들이 그렇듯 베트남도 겨울 건기(11월~3월)와 여름 우기(4월~10월)가 반복되는데, 건기에는 온도와 습도가 다소 낮아진다. 겨울에 베트남으로 여행 가면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한국의 겨울 한파를 피할 수 있다. 다만 베트남이 위아래로 길게 뻗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 북쪽의 하노이와 남쪽의 호치민의 기후 차이가 꽤 크다. 우리 삼부자는 적도에 한결 더 가까워 1년 내내 여름인 호치민에 왔기 때문에 더울 각오는 미리 다지고 왔다.



베트남에서의 첫 발자국은 활주로 한가운데였다. 특유의 습하고 알싸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공기가 느껴졌다. 살결에 닿는 바람의 감촉도 진득했다.


"여기 내리면 베트남이에요?"

"자아, 우리가 배뜨남에 왔습니다. 왔어요. 발 조심해라."


40년간 들어왔던 기분이 좋아졌을 때 아버지 특유의 말하는 리듬이 나왔다. 베트남이 아니고, 배뜨남이다. 도착했다. 우리는 셔틀을 타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에서 운행하는 긴 저상 셔틀을 타는 짧은 순간만 상상할 수 있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있다. '저 사람은 베트남에 왜 왔을까? 심드렁 한 걸 보니 베트남에 자주 오는 사람인가 보군.' 따위의 생각이 스쳐갔다.




삼모녀 원정대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긴 줄에서 우리 앞에 한 가족이 섰다. 우리는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아들이었고, 그쪽은 할머니와 엄마, 딸이었다.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처럼 머리가 희었다. 딸내미는 아들보다 2살쯤 어려 보였다. 엄마는 큰 키에 화려한 패턴이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삼부자 원정대와 삼모녀 원정대가 같은 줄에 선 것이다. 한참을 같이 서 있는데 삼모녀 원정대 막내가 우리 아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뜨거운 7월의 호치민행 비행기에 어린아이는 거의 없어서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저씨, 이 오빠는 몇 살이에요?"

"이 오빠는 8살, 1학년이야."

낯을 가리는 아들 대신 내가 답했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가 놀라며 물었다.


"와, 키가 정말 크네요. 1학년인데 이렇게 커요?"

"네, 맞아요. 반에서 제일 큰 편이에요."

"그렇죠? 우리 OO 이는 6살인데 머리 하나 차이가 나네요."


엄마는 아이가 키가 크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엄마를 닮았으면 키가 클 텐데 아빠가 작은가 보다 생각했다. 엄마는 지난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는 딸을 재우느라 고생했는지 아이에게 한 마디 했다.


"밤에 일찍 자야 해. 그래야지 이 오빠처럼 키가 크는 거야."

"맞아. 이 오빠는 9시 넘으면 자서 이렇게 키가 컸어"

내가 덧붙였다. 엄마의 의도에 맞춰주었다. 엄마가 하면 잔소리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간증이 된다.


"아저씨, 근데요. 우리 아빠는요. 맨날 밤에 놀다가 잠을 안 자요. 그래서 키가 작아요."

"그래? 근데 아빠는 어른이라 이미 키가 다 커서 괜찮아. 친구는 한참 더 클 거니까 일찍 자면 더 많이 클 것 같아."


아이는 듣는 엄마가 민망할지 모르는 아빠에 대한 폭로를 스스럼없이 했다. 나는 그 가족이 민망하지 않게 받아넘겼다. 내가 한 대답에 스스로 뿌듯해하던 중 엄마가 물었다.


"할아버지랑 아빠랑 아들이랑 셋이 오셨어요?"

"네, 남자끼리 셋이 여행 왔어요."

"아, 재미있겠어요. 엄마는 같이 안 오셨나 보다."

"네, 동생을 돌보고 있어요. 한국에서 둘이 데이트 많이 한다고. 셋이 여행 오신 거예요?"

"아니에요. 저희는 여기 자주 오는데 아이가 곧 국제학교 들어갈 거라서요. 여기 베트남에 국제학교가 잘 되어 있거든요."


삼모녀는 삼부자보다 베트남과 더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베트남과의 인연이 좀 더 깊어질 수도 있을 거다. 아들은 베트남의 국제학교를 다니고, 나는 베트남과 비즈니스를 하고, 아버지는 1년에 절반쯤은 베트남에 가서 살며 노후를 보낼 수도 있을 거다. 물론 그런 꿈을 꾸고 온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삼부자에겐 이번 베트남 원정이 베트남과의 인연의 시작점이다. 삼모녀의 모습은 우리 가족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삼모녀 원정대의 할머니는 입국장에서 캐리어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를 보며 "아유, 여자애가 저렇게 힘이 넘쳐요 아주." 라면서 눈을 떼지 않았다. 투박한 옛날 사람 말투 속에도 딸과 손녀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자식과 손주와 함께 있는 흰머리의 우리 아버지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삼모녀와 삼부자는 세대별로 그에 맞는 대화를 하며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주들이 얼마나 금방 크는지에 대해, 아빠와 엄마는 베트남의 교육에 대해, 아들과 딸은 서로의 이름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통성명을 한 8살 오빠와 6살 동생은 헤어지기가 싫어, "짐 찾는 곳에서 다시 만나." 자고 했지만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들은 공항을 떠나기 전까지 "친구는 어디로 갔을까요?"라 물으며 아쉬워했다. 짐을 찾으러 캐러셀로 가는 중 아버지가 나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한다.


"TV에 나오는 A가족이야."

"네? A 씨요? 아... 그러고 보니 맞네. 아버지는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난 그 프로그램을 봤잖니."


삼모녀 원정대는 알고 보니 아버지가 즐겨 보셨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연예인과 가족이었다. 그래, 확실히 그 엄마가 눈에 띄는 사람이긴 했었다. 어쩌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나 외에는 다 그녀가 누군지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알려진 유명인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항상 나를 알아보는 눈빛을 느낄 거다. '왜 저 사람이 저가 항공사를 타고 왔을까? 베트남에는 뭐 하러 온 걸까?'라는 옆 사람의 속마음 풍선이 보일 수도 있다. '저기 저 사람 누구야. 누구' 라며 복화술 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일상일 거다. 그런 와중에 본인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삼부자에게 잠깐이나마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걸까. (아버지는 A를 알아보았지만 그에게 실례가 될지 몰라 전혀 모르는 척을 했었다. 아버지답게)


사람들은 연예인 혹은 유명인을 보면 놀란다.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는다.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특별한 존재라는 느낌이기에 그럴 거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도 삼시세끼 먹고 나와 비슷한 고뇌를 하는 사람임을 느끼고는 그러지 않게 되었다. 연예인이 된 친구가 나와 똑같이 자식 걱정을 털어놓을 때부터인지, 일 덕분에 세간에 알려진 분들과 인터뷰를 몇 번 하고 나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들도 대중에게 소비되는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주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씩씩한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


그렇게 느낀 후로는 'A'라고 부르지 않고 'A 씨'라고 부르는 것으로 내 작은 인식의 변화를 드러냈다. "이병헌 연기 잘한다." 대신 "연기는 이병헌 씨가 최고지"라고 하는 거다. "손흥민 또 골 넣었더라." 대신 "손흥민 선수가 해트트릭 했던데."라는 식이다. 처음엔 좀 어색했다. 내가 아나운서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잘 안 될 때도 많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연예인들도 누군가에게 물건처럼 불릴 이유는 없다. 언젠가 만나서 삶을 나누고 대화해보고 싶은 많은 유명인들이 있는데 그 일이 현실이 됐을 때, '내가 과거에 당신을 물건처럼 막 불렀습니다.'라고 고백할 자신도 없다.


호치민 공항에서 만났던 A 씨의 가족은 우리에겐 연예인이 아니었다. 우리와 비슷한 한 가족이었다. 꿈꾸는 만큼 미래가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 본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식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싶은 부모, 자식과 손주에게 도움 되는 역할을 자처하려는 조부모가 있다. 삼부자 베트남 원정대가 여행 이후에 써내려 갈 역사의 한 모습을 살고 있는 선배이기도 하다. 삼모녀의 베트남 살이를 마음 다해 응원한다.




삼부자의 첫 미션


호치민 떤선녓 국제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양한 인종이 북적이는 공항은 이곳이 베트남의 국제 도시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인천공항이 개항하기 전 90년대의 김포공항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세계 어디를 가든 인천공항 급의 시설이나 서비스를 기대하면 안 된다. 특급의 무언가를 기대하면 실망만 하게 된다. 호치민 시 전체의 시설 평균을 봤을 때, 나름 잘 갖춰진 공항이 아닐까 싶다. 우리 세 남자에게는 이 정도 공항이면 매우 족하다. 애초에 우리 삼부자는 럭셔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호치민 시는 베트남의 최대 도시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고 통일이 된 이후 '사이공'이라는 옛 명칭을 호치민 시로 바꿨다. 하지만 현지인들에겐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항공권을 살펴보니 떤선녓 국제공항의 코드도 SGN이다. 오래도록 불러왔던 이름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름을 부를 때에는 대상에 대한 나의 추억과 감정이 담기는 법이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개명을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이름을 바꾼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는 친구가 영 어색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특별히 꼭 새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하지 않으면 옛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나와 우정의 시간을 보냈던 친구는 새 이름 호치민 보다는 추억이 담긴 사이공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사이공 사람들도 그렇겠지.


호치민 시는 16개의 군과 1개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19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사이공강 동쪽의 2군, 9군, 뚜득군을 통합해 새로 개발할 요량으로 '시 안의 시' 개념의 뚜득시로 병합한 모양이다. 많은 여행객들은 호치민의 중심지 1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관광 명소들이 1군에 몰려있기도 하고, 가장 안전한 지역이기도 하다.

호치민 시 (사이공)의 행정구역 지도

삼부자 원정대의 첫 미션은 짐 찾기였다. 짐 찾는 것이 무슨 미션이냐 싶지만, 우리 세 남자에겐 처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온 정식 미션이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와 아내, 두 아들은 싱가포르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코로나가 잠잠해진 후 처음이었다. 그 전의 해외여행은 두 돌도 되기 전이니 싱가포르가 아들이 기억하는 첫 해외여행이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공항에서 캐리어를 잃어버렸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였다. 두 아들을 데리고 밤새 짐을 찾느라 공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분실 신고를 하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땀에 절은 유일한 옷 한 벌을 그대로 입고 싱가포르를 돌아다녔다. 첫날부터 긴장과 짜증이 우리를 짓눌렀다. 저녁나절쯤 공항으로부터 누군가 바꿔간 짐을 찾았다는 그야말로 '해피콜'을 받기 전까지는 무얼 사서 들어가야 내일도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아들과 나는 짐을 잃어버리면 어떤 고생길이 열리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삼부자의 첫 미션은 짐 찾기였다.


"아빠, 우리 이번엔 진짜 짐 잃어버리면 안 돼요."

"절대 잃어버리지 말자. 우리 짐 잃어버리면 수영도 못해."

"근데 여기가 맞아요? 왜 우리 게 안 나오죠?"

"아니야. 나올 거야. 여기가 분명 맞는데..."


슬슬 초조했다. 같은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 짐을 찾아 떠났다. 혹시 다른 캐러셀에 잘못 올라갔을까 싶어 캐러셀 섹션을 두세 번 왕복해 봤다. 아버지는 끝에서 처음으로 나는 처음에서 끝으로. 그 사이 아들은 우리 비행기의 캐러셀을 지켜봤다. 이제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비행기의 짐도 나오고 있다. 첫 번째 고생은 무용담이지만, 두 번째 고생은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아들이 소리쳤다.


"아빠, 저기 나오는 빨간 거 저거 아니에요?"


삼부자 원정대는 고난도 첫 미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호치민 공항에 착륙한 지 1시간 반, 짐을 기다린 지 30분이 넘어서였다. 아무래도 호치민의 공항 시스템이 그리 좋지는 않은가 보다. 아들은 이렇게 실패의 극복을 배웠다. 나는 원정대 플랜 A대로 진행시킬 수 있음에 그저 안심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초조해하던 아버지도 주름을 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 남자는 짐을 찾고 웃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그래, 세상에 짐 찾은 것만으로도 신나는 여행은 없지.' 삼부자 여행은 이렇게 특별하다.

짐 찾았다. 미션 성공


공항에서 몇 가지 할 일을 더 했다. 우선 우리 원정대의 무전기이자 지도가 되어 줄 유심을 샀다. 굳이 한국에서 따로 유심을 살 필요는 없다. 호치민 공항에 내려 가장 싼 곳을 찾으면 된다. 입국 수속장 근처에선 한 시가 급한 사람들을 노려 300,000 VND (15,000원)이지만, 짐을 찾고 여유 있게 둘러보면 30일 무제한 유심이 200,000 VND (10,000원) 정도면 한다. 역시 장소에 따라 가격이 다른 것은 비즈니스의 룰이다. 한국에서 결제하고 가면 7,000원에도 하지만 수령처가 어딘지 찾는 것이 더 불편할 수 있다.


환전 역시 공항에서 하고 가는 것이 편하다. 우리 삼부자는 공항에서 환전을 못했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고생을 만들어 줄지 이 때는 몰랐다. 시내로 가면 더 싼 환율이 있을 것 같지만, 큰돈 바꾸지 않는 이상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믿을만한 환전소가 가까이 없을 수도 있다. 


베트남 동은 단위가 매우 크지만, 한국 돈으로 얼마인지 환산하는 것이 크게 복잡하진 않다. 0을 하나 빼고 반으로 나누면 한국 돈이 나온다. 100,000 VND = 5,000원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된다. (정확히는 그리고 10%를 더해 5,500원이다) 이 방법을 터득하고 난 이후로 우리 원정대의 환율 계산 담당은 1학년 수학 영재가 맡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미리 깔아 둔 동남아시아 여행 필수 앱 그랩을 켜고 첫 숙소를 찍어 잡는다. 여행 책과 베트남 관련 유튜브 마다 택시 사기에 대한 경고가 많다. 아버지의 베트남 탐구 내용에도 당연히 포함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삼부자에겐 걱정이 없다. 여러 내용이 있지만 요약하면 그랩을 타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그랩이 없는 베트남 여행을 상상하긴 어렵다. 그 나라의 사회적 신뢰 지수를 '사기를 얼마나 걱정해야 하는지'라 본다면, 그랩은 베트남의 신뢰 지수를 꽤 많이 올리는 혁신이라 봐도 될 것 같다.

비나선 이나 마일린 택시만 타라. (인척 하는 택시도 조심)
함부로 지갑을 열거나 큰돈을 줘서 바꿔치기 당하지 마라.
같은 가격에 태워준다는 호객을 무시하라.
웬만하면 그랩을 타라.


그랩 잡는 데에도 우리는 각자의 한몫을 했다. 나는 그랩을 잡았다. 아버지는 짐을 챙기고 주변을 살폈다. 아들은 우리가 콜한 차 넘버를 찾았다. 삼부자는 공항을 떠나 첫 그랩을 잡아 타고 베이스캠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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