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도 사람이다.
비행기가 흔들렸다. 아들은 무서운지 내 손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
"아빠, 왜 이렇게 많이 흔들려요? 비행기가 떨어지진 않겠죠?"
"당연하지, 우리가 구름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구름을 뚫고 내려오잖아. 구름을 지날 때는 이렇게 흔들려."
"그런데 아까 구름 위에 있을 때도 흔들렸잖아요."
"난기류를 만나면 그럴 수 있어."
"난기류가 뭔데요?"
"어... 공기가 막 움직이는 거야."
"왜요?"
"공기들 온도가 달라서 그럴걸? 찬물하고 따뜻한 물 섞으면 두 물이 막 돌아다니다가 섞이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요?"
"글쎄, 공기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1학년은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폭발하는 때다. '왜'의 폭격 앞에 한국인 아빠는 한 없이 무력하다. 문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아는 지식을 모두 끌어 모아야 한다. 'A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B라는 단어를 써도 될까? B가 뭔지 모를 텐데. 일단 B라고 이야기하고 B가 뭐냐고 하면 다시 설명하지 뭐' 따위의 판단을 계속해야 한다. 진땀을 빼며 최선을 다해 설명하다가 슬슬 문답을 끝내야 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네가 생각하기에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다. 최고의 답은 질문이다. 인사 청문회에서야 질의하는 국회의원에게 장관 후보자가 반문하면 질타받지만, 1학년 아빠는 괜찮다. 폭격하는 '왜'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공도 필요하다.
왜의 폭격 속에서도 삼부자가 탄 Vietjet 비행기가 베트남 호치민의 떤선녓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공중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속도감이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극적으로 느껴졌다. 비행기가 착륙해 땅의 진동이 느껴지면 누군가 나를 여행지의 시공간으로 급격히 빨아들이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엔 베트남 사이공 블랙홀이다.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 옆에는 사랑하는 노인과 소년이 함께 있었다.
착륙의 안도감을 느낄 때쯤, 비행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슬픔과 청아함 사이 어딘가의 목소리였다. 베트남을 즐기러 온 관광객보다는 애절한 사연을 가진 여행자를 위해 준비된 음악임이 틀림없었다.
Tell me all about this name that is difficult to say
It was given me the day I was born
Want to know about the stories of the empire of old
My eyes say more of me than what you dare to say
All I know of you is all the sights of war
A film by Coppola, the helicopter's roar
One day I'll touch your soil
One day I'll finally know your soul
One day I'll come to you
To say hello... Vietnam
'안녕, 베트남 Hello Vietnam'은 어릴 적 해외로 입양된 베트남 소녀 Pham Quynh Anh 가 베트남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다. 베트남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 속의 헬리콥터 굉음뿐이지만 언젠가 베트남 땅을 밟고, 베트남의 영혼을 알고, '안녕, 베트남'이라고 말하겠다는 소녀의 시다. 정체성의 희구에는 강렬한 힘이 있다. 이 노래는 여행 후 남을 몇 가지 중에 하나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자들에겐 원곡인 불어 버전의 Bonjour Vietnam을 더 추천한다.)
그녀에 비해 나는 베트남에서 찾을 영혼이 전혀 없다. 영화 애호가들에게 최고의 전쟁영화로 꼽힌다는 '지옥의 묵시록' 속 베트남 전을 본 적도 없다. 베트남어라곤 Xin Chao (신 짜오 - 안녕하세요) 밖에 모르는 무관심자였다. 나는 그저 70세가 넘은 '미스터 사이공'과 함께 온 손님일 뿐이었다.
그런 내가 마치 새 삶을 시작하러 떠나는 영화 주인공처럼 노랫말 속에 푹 빠져들다니... '사이공에 뭐가 있긴 있나보구만' 싶었다. 나의 뿌리 아버지와 나의 열매 아들이 함께 있어서였을까. 그런데 뭐, 아무렴 어떤가. 어쩔 땐 좀 오버스러워야 인생에 새로운 물이 들어온다. 감정 과잉은 창조로 이어지지 않던가. 청년의 오버가 열정이라면, 중년의 오버는 청승맞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베트남에서의 첫 발자국은 활주로 한가운데였다. 특유의 습하고 알싸한 동남아시아 특유의 공기가 느껴졌다. 살결에 닿는 바람의 감촉도 진득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겨울방학 시즌에 베트남을 찾는 이유는 날씨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많은 나라들이 그렇듯 베트남도 겨울 건기(11월~3월)와 여름 우기(4월~10월)가 반복되는데, 건기에는 온도와 습도가 다소 낮아진다. 겨울에 베트남으로 여행 가면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한국의 겨울 한파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8월의 베트남으로 날라왔다. 그것도 적도에 한결 더 가까운 사이공이었다.
"할아버지, 여기 내리면 베트남이에요?"
"자아, 우리가 뱃뜨남에 왔습니다. 왔어요. 발 조심해라."
아버지가 특유의 기분 좋을 때 말하는 리듬이 나왔다. 40년간 들어왔던 리듬이었다. 베트남이 아니고, '뱃뜨남'이다. 도착했다. 우리는 셔틀을 타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공항에서 운행하는 긴 저상 셔틀을 타는 짧은 순간만 상상할 수 있는 여행객들의 모습이 있다. '저 사람은 베트남에 왜 왔을까? 심드렁 한 걸 보니 베트남에 자주 오는 사람인가 보군.' 따위의 생각이 스쳐갔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긴 줄에서 우리 앞에 한 가족이 섰다. 우리는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아들이었고, 그쪽은 할머니와 엄마, 딸이었다.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처럼 머리가 희었다. 딸내미는 아들보다 2살쯤 어려 보였다. 엄마는 큰 키에 화려한 패턴이 있는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삼부자 원정대'와 '삼모녀 원정대'가 같은 줄에 선 것이다. 한참을 같이 서 있는데 삼모녀 원정대 막내가 우리 아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뜨거운 7월의 호치민행 비행기에 어린아이는 거의 없어서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저씨, 이 오빠는 몇 살이에요?"
"이 오빠는 8살, 1학년이야."
낯을 가리는 아들 대신 내가 답했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가 놀라며 물었다.
"와, 키가 정말 크네요. 1학년인데 이렇게 커요?"
"네, 맞아요. 반에서 제일 큰 편이에요."
"그렇죠? 우리 OO 이는 6살인데 머리 하나 차이가 나네요."
엄마는 아이가 키가 크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엄마를 닮았으면 키가 클 텐데 아빠가 작은가 보다 생각했다. 엄마는 지난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는 딸을 재우느라 고생했는지 아이에게 한 마디 했다.
"밤에 일찍 자야 해. 그래야지 이 오빠처럼 키가 크는 거야."
"맞아. 이 오빠는 9시 넘으면 자서 이렇게 키가 컸어"
내가 덧붙였다. 엄마의 의도에 맞춰주었다. 엄마가 하면 잔소리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간증이 된다.
"아저씨, 근데요. 우리 아빠는요. 맨날 밤에 놀다가 잠을 안 자요. 그래서 키가 작아요."
"그래? 근데 아빠는 어른이라 이미 키가 다 커서 괜찮아. 친구는 한참 더 클 거니까 일찍 자면 더 많이 클 것 같아."
아이는 듣는 엄마가 민망할지 모르는 아빠에 대한 폭로를 스스럼없이 했다. 나는 그 가족이 민망하지 않게 받아넘겼다. 내가 한 대답에 스스로 뿌듯해하던 중 엄마가 물었다.
"할아버지랑 아빠랑 아들이랑 셋이 오셨어요?"
"네, 남자끼리 셋이 여행 왔어요."
"아, 재미있겠어요. 엄마는 같이 안 오셨나 보다."
"네, 동생을 돌보고 있어요. 한국에서 둘이 데이트 많이 한다고. 셋이 여행 오신 거예요?"
"아니에요. 저희는 여기 자주 오는데 아이가 곧 국제학교 들어갈 거라서요. 여기 베트남에 국제학교가 잘 되어 있거든요."
삼모녀는 삼부자보다 베트남과 더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베트남과의 인연이 좀 더 깊어질 수도 있을까? 아들은 베트남의 국제학교를 다니고, 나는 베트남과 비즈니스를 하고, 아버지는 1년에 절반쯤은 베트남에 가서 살며 노후를 보낼 수도 있을 거다. 물론 그런 꿈을 꾸고 온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우리 삼부자에겐 이번 베트남 원정이 베트남과의 인연의 시작점이다. 삼모녀의 모습은 우리 가족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삼모녀 원정대의 할머니는 입국장에서 캐리어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를 보며 "아유, 여자애가 저렇게 힘이 넘쳐요 아주." 라면서 눈을 떼지 않았다. 투박한 옛날 사람 말투 속에도 딸과 손녀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자식과 손주와 함께 있는 흰머리의 우리 아버지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삼모녀와 삼부자는 세대별로 그에 맞는 대화를 하며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주들이 얼마나 금방 크는지에 대해, 아빠와 엄마는 베트남의 교육에 대해, 아들과 딸은 서로의 이름이 무엇인지 이야기했다. 통성명을 한 8살 오빠와 6살 동생은 헤어지기가 싫어, "짐 찾는 곳에서 다시 만나." 자고 했지만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들은 공항을 떠나기 전까지 "친구는 어디로 갔을까요?"라 물으며 아쉬워했다. 짐을 찾으러 캐러셀로 가는 중 아버지가 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TV에 나오는 A가족이야."
"네? A 씨요? 아... 그러고 보니 맞네. 아버지는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난 그 프로그램을 봤잖니."
삼모녀 원정대는 알고 보니 아버지가 즐겨 보셨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연예인과 가족이었다. 그래, 확실히 그 엄마가 눈에 띄는 사람이긴 했었다. 어쩌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나 외에는 다 그녀가 누군지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알려진 유명인의 삶을 생각했다. 항상 나를 알아보는 눈빛을 느낄 것이다. '왜 저 사람이 저가 항공사를 타고 왔을까? 베트남에는 뭐 하러 온 걸까?'라는 옆 사람의 속마음 풍선이 보일 수도 있다. '저기 저 사람 누구야. 누구' 라며 복화술 하는 사람을 보는 게 일상일 거다. 그런 와중에 본인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삼부자에게 잠깐이나마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아버지는 A를 알아보았지만 그에게 실례가 될지 몰라 전혀 모르는 척을 했었다. 아버지답게)
사람들은 연예인 혹은 유명인을 보면 놀란다.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는다.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특별한 존재라는 느낌이기에 그럴 거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도 삼시세끼 먹고 나와 비슷한 고뇌를 하는 사람임을 느끼고는 그러지 않게 되었다. 연예인이 된 친구가 나와 똑같이 자식 걱정을 털어놓을 때부터인지, 일 덕분에 세간에 알려진 분들과 인터뷰를 몇 번 하고 나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그들도 대중에게 소비되는 '대상'이기 이전에 삶의 '주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씩씩한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
그렇게 느낀 후로는 'A'라고 부르지 않고 'A 씨'라고 부르는 것으로 내 작은 인식의 변화를 드러냈다. "이병헌 연기 잘한다." 대신 "연기는 이병헌 씨가 최고지"라고 하는 거다. "손흥민 또 골 넣었더라." 대신 "손흥민 선수가 해트트릭 했던데."라는 식이다. 처음엔 좀 어색했다. 내가 아나운서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잘 안 될 때도 많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연예인들도 누군가에게 물건처럼 불릴 이유는 없다. 언젠가 만나서 삶을 나누고 대화해보고 싶은 많은 유명인들이 있는데 그 일이 현실이 됐을 때, '내가 과거에 당신을 물건처럼 막 불렀습니다.'라고 고백할 자신도 없다.
호치민 공항에서 만났던 A 씨의 가족은 우리에겐 연예인이 아니었다. 우리와 비슷한 한 가족이었다. 꿈꾸는 만큼 미래가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이, 본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식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싶은 부모, 자식과 손주에게 도움 되는 역할을 자처하려는 조부모가 있다. 삼부자 베트남 원정대가 여행 이후에 써내려 갈 역사의 한 모습을 살고 있는 선배이기도 하다. 삼모녀의 베트남 살이를 마음 다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