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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초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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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ontroppo Jul 18. 2016

고래와 펭귄과 우주와 절벽

C 이야기


  C는 끝없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웅장한 대자연 앞에 서면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드는데, 그것은 꼭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갈 때처럼 횡격막이 쑥 꺼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무서운 놀이기구는 못 타기 때문에 놀이공원에서는 언제나 대관람차만 타는 C는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만나면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C는 쉬는 시간에 어린 왕자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어 의자를 자꾸만 뒤로 당기는 어린 왕자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C를 보고 뒤에서는 구시렁대는 소리가 났다. 요즘 세상에 답지 않은 체 하는 C가 고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뭐, 어린 왕자를 처음 읽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고깝게 생각하든 아니든, C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실은 잘 모르겠다.


  그해 여름, C와 나는 밤마다 만나 온동네를 쏘다녔다. 차가 다니지 않아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도로 한가운데로 들어가 중앙선을 따라 걷기도 하고, 이 동네와 저 동네의 공원을 도장깨기 하듯이 하나하나 찍기도 했다. 어느 날은 500원짜리를 10개도 넘게 준비해서 뽑기 기계를 돌렸다. C는 뽑기 기계 손잡이를 돌릴 때 나는 드륵드륵 소리가 좋다고 했다. 우리는 드륵드륵 뽑기 기계를 돌려서 요상하게 생긴 인형과 플라스틱 반지 따위를 뽑았다. 플라스틱 반지에는 고리 행성과 고래, 펭귄 모양의 오브제가 붙어 있었다. 고래를 좋아하는 C는 소리를 빽 질렀다.

  우리는 인형과 반지를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고, 모기에 물리든지 말든지 나란한 벤치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워 까만 하늘을 보았다. C는 하늘도 좋아했다. 우주도 좋아했다. 끝이 없기 때문이었겠지. 한겨울 밤 학교에서 하교하는 길에 은하아파트 411동 아래에 서서 하늘을 보면 오리온자리가 제일 잘 보인다는 걸 알려준 것도 C다. 그렇지만 그날 밤에 별을 바라보면서 C는 동시에 만유인력이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이러니. 내가 만약에 우주를 좋아했으면 진작에 우주로 날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걸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다. C는 내 말을 듣고 숨이 넘어가게 낄낄댔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구과학이 100점이라고 했다. 나는 48점을 받았었다. 못됐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다. 그 뒤로도 C는 왜 어린 왕자가 의자를 뒤로 당기는 게 슬펐을까 가끔 생각해 보게 됐다. 여름날 밤 뜬금없이 지구과학이 100점이라던 C의 말을 깨달은지는 오래였는데, 의자를 뒤로 당기는 게 왜 슬펐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직접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은 C가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수평선 너머로 훌쩍 떠났기 때문이다.


  "A국으로 가면 세상의 끝이 있대"

  세상의 끝? 지구는 둥글다며? 그래서 자꾸 걸어가서 온 세상 어린이를 만난다는 것 아니었나?

 "그리고 B국에 가면 끝내주는 절벽이 있대"

 그리고 C는 엽서를 보내준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났다. 몰랐는데 그동안 돈을 꽤 많이 모은 모양이었다. 그 '끝내준다'는 절벽에 쏟아부을라고!


  C는 두 장의 사진을 보냈는데, 하나는 펭귄 떼랑 키를 맞추고 쪼그려 앉은 자신을 찍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C의 말대로 정말 끝내주게 생긴 절벽을 찍은 것이었다. 세상의 끝엔 펭귄들이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엽서를 읽어보니 C는 세상의 끝보다는 절벽 쪽이 훨씬 맘에 든 게 틀림없었다. 엽서 끝에는 계속 여행 중이니 답장은 어려울 것이라며 언젠가 정착하게 되면 주소를 알려준다고 쓰여 있었다. 좋아 보이네, 다행이다.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날 새벽에 목이 말라 깨어 물을 마시다 우연히 내 방 벽에 붙어있는 절벽 사진에 시선이 꽂혔다. 한참 바라보다 보니 그제야 C가 어린 왕자를 보고 울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실은 C, 어린 왕자가 부러웠던 것 아닐까. 소행성에 살면서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해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던 어린 왕자가, 의자를 뒤로 당길수도, 보고 싶은 것을 매번 볼 수도 없었던 C는 많이 부러웠던 것 같다. 왠지 절벽을 찍은 카메라 뒤 C의 표정은 많이 행복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잠들려 누운 그날 새벽에 꿈을 꾸었다. 분홍색 고래와 연두색 펭귄이 빛나는 하얀 고리를 가진 행성을 드륵드륵 소리를 내면서 돌고 있는 꿈이었다. 펭귄이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내 팔을 잡아끌었다. 펭귄의 뒤와 고래의 앞에 서서 나도 같이 행성을 돌았다. 우리한테서 드륵드륵 소리가 났다. 평화로운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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