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받지 않겠다. 나는 이미 내년 손글씨 다이어리를 장만했으므로
평소보다 보름 정도 늦게 2023 스타벅스 플래너가 등장했다. 굿즈를 두고 구설을 겪었으니 더 단단히 준비했겠지. 음... 리추얼 플래너와 라이프 저널. 리추얼이라는 단어에서 왠지 조심스러움이 묻어난다. 저널이라니 해방일지도 떠오른다. 깊고 세련된 초록색과 빨간색 아니, 신시어 레드와 하우스 그린이라니 이름도 예쁘네.
하지만 나는 올해 스타벅스 플래너를 갖지 않겠다. 정말이다.
이미 한 달 전인 10월 중순에 2023년 다이어리를 장만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는데 아빠가 낚시 가시는 새벽길에 카톡으로 '생.축.' 두 글자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낮에도, 오후에도, 밤에도 아무도 내 생일을 기억하거나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낮엔 그러려니 했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니, 다들 외출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겠지. 나도 밤에 카톡 보고 부랴부랴 축하 메시지 보낸 적 많잖아' 애써 이해하면서. 그런데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감감무소식이자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애 낳고 키운다는 핑계로 사람들한테 소홀했지' 반성했다. 휴대전화엔 회원등록이 된 각종 업체의 축하 메시지뿐. 카톡으로 누구 하나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자 몹시 우울해졌다. 인과응보야, 그간 잘못 살았구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생일이 될 뻔했다.
그날 나는 뉴스를 전혀 못 봤다. TV나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생일 축하 연락을 기대하며 이따금 휴대전화를 들여다봤을 뿐. 그래서 몰랐다. 카카오톡 데이터 센터에 불이 나고 그래서 카톡이 불통이 되었다는 걸.
늦은 밤 비로소 카톡 사건을 알게 되고, 내가 얼마나 카톡에 심하게 의지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선물하기, 이모티콘,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생일부터 편하다는 이유로 다 내려놓았다. 정확하게 생각나는 기념일이 몇 개 안 된다. 카톡이 알아서 띄워주겠지, 믿은 지 오래다. 내가 그간 주변에 소홀했던 건 분명하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 다른 사람들도 나 같은 상황이었으리라 믿으련다.
이러다 현생의 감각이 무뎌질 것 같아 두려워졌다. 그래, 다이어리를 손글씨로 다시 써야겠다. 자연스럽게 스타벅스가 떠올랐다. 생일 선물로 스타벅스 음료 기프티콘을 받곤 했는데, 생일이 10월 중순이다 보니 2주 뒤부터 스타벅스 플래너 이벤트가 시작되면 선물로 받은 기프티콘으로 다이어리를 마련했다. 말하자면 카톡으로 받는 생일 축하와 스타벅스 다이어리 장만은 한 세트였다. (그래도 현금이 족히 몇만 원은 들어간다.) 몇 년 반복했더니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당연하게 스타벅스로 향한다. 새 이벤트 음료는 뭔지 궁금하다. 길들여졌다.
올해는 다르게 해 보겠다. 책장에 쓰지 않은 새 다이어리가 이미 많다. 세보니 2040년까지는 쓸 수 있겠다. 적당한 크기의 고운 녀석을 집어 든다. 해가 지난 다이어리지만 흐릿한 예전 날찌 위에 새 날짜를 365개 꾹꾹 눌러쓰는데 채 10분이 안 걸린다. 챙겨야 할 기념일, 떠오르는 친구의 생일과 부모님의 생신을 하나하나 적어 넣었다. 음력과 양력도 찾아보고, 휴가는 언제 쓸지, 한 해에 걸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2023년을 미리 다녀온 기분이다.
물론 연말 전에 궁금해서 스타벅스 매장에 들러 샘플을 기웃거릴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직접 365개의 날짜를 적은 이 다이어리를 꽉 부여잡아 보련다. 카톡과 스타벅스로부터 동시에 해방된 기분이다. 꼭 챙기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과 2023년의 365일, 그 물리적인 실감이 빈자리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