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게부터 내리는 빗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텃밭을 푹 적실만한 비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2평 남짓 텃밭을 빌려 쓰는 초보 농사꾼이다. 서울이 고향인 남편은 농사 경험이 전혀 없고, 나는 제주 밀감 밭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가 가꾸시던 우영팟은 접근 금지였다. 아이들은 밭엔 관심도 없고 흙 파는 것과 곤충 찾는 일에만 열광했다.
그래도 텃밭은 마음이 넓다. 농부가 서툴지만 찾을 때마다 내어 주기만 하는 수확물 앞에선 감격의 미소를 짓게 했기 때문이다.
4월부터 시작된 농사는 시작이 좋았다. 옮겨심기 전 작은 포트에 있던 모종들은 첫 모습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훌쩍 자랐다. 두 달 넘게 먹은 잎채소들은 아삭거리며 생으로 먹는 즐거움을 주었다. 씹을 때마다 입안을 맴돌며 전혀 질기지 않고 알맞게 아삭거렸다.
밭을 다닌 후부터 가족들의 컨디션을 매일 살피듯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날씨다. 그리고 간절하게 '단비'를 기다리게 되었다. 밭에 물을 주려고 한참을 물조리개로 오가지만 시원하게 내리는 비만큼은 못했다.
항상 일기예보를 살피지 않으면 헛수고를 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며칠째 쨍쨍 해가 내리쬐서 밭이 바짝 말라 물을 주고 왔는데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 연 이틀을 온 것이다. 비가 그치고 밭에 가보니 여기저기 물고랑이 생겨있었다. 뿌리가 드러난 모종에 흙을 덮어주고, 고추 지지대는 단단한지 살펴야 했다.
해가 없이 흐린 날만 이어지면 물을 준 게 마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럼 물을 주기가 참 애매모호 해진다.
고추와 깻잎은 남편이 기대가 컸다. 하지만 성장 속도는 잎채소들과 차이가 났다. 게다가 물을 많이 먹는 편이었다. 고추는 충분히 물을 주어도 다음 텃밭에 가면 잎사귀가 시들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가서 물을 주기엔 미안하기만 했다.
매일 비가 간절했다. 하루 종일 충분히 비가 내린 날은 2-3일 후에 가도 초록 이파리들이 반질 반질거렸고 땅도 적당한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반대로 2-3일 동안 비만 내린 날은 할 일이 많아졌다. 비가 그치면 밭으로 달려갔다. 모종들이 쓰러져버리거나 물이 안 빠져서 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키가 커진 상추와 치커리는 지지대를 세워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자주 쓰러졌다. 잡초 뽑기는 젖은 땅이라 더 쉽게 뽑아졌다. 농부가 비 온 뒤엔 꼭 밭을 나가 봐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열무를 뽑고 나서 두 번째 파종을 했는데, 다음날부터 비가 여러 날 왔다. 씨앗을 심고 흙을 단단히 덮었지만 싹이 난 열무는 뿌린 씨앗에 반도 안되었다. 이럴 땐 내린 비가 좀 얄미워진다.
비가 며칠 내리고 화창한 날이 이어지면 '고추꽃도 떨어지지 않겠지?'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받은 '호랑이콩은 알이 얼마나 커졌을까?' 내심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밭에 떨어진 고추꽃과 시들해진 콩잎을 보면 '아차' 싶어 진다. 쉬운 게 정말 없는 듯하다.
더군다나 농부의 마음을 이해하기엔 우리 부부는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농법은 공부를 하면 도움이 되었지만, 자연이 내려주는 날씨에 대해선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없었다. 단순하게 수확시기만 보며 따라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처럼 날씨를 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부부는 일기예보를 미리 챙겨 보며 텃밭을 갈 날을 정했다. 그리고 틈이 나면 혼자 밭으로 갔다. 착한 텃밭은 늘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선물을 주었다.
펜데믹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조심해야 했지만, 텃밭은 집 다음으로 편안함을 주었다. 밭에서 난 채소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며, 종류 별로 꺼내 먹는 재미가 매일매일 쏠쏠했다. 씁쓸한 치커리만 남았는데 다시 밭에 가는 날은 그마저 동이 났다.
6월 한 달 일기예보를 보며 비 오는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세어보았다. 그나저나 또 고민이다. 장마가 오기 전에 감자 수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농부의 근심은 날마다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일기예보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