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텃밭은 착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배추모종이 모두 죽을 듯했는데, 놀라운 치유력으로 살아났다. 시들했던 무 모종도 기운을 차렸는지 귀를 쫑긋 올린 강아지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배추가 밭에 적응을 하는 동안 고생을 한 듯했다. 뿌리를 내리는 동안 몸살을 앓더니 꼬박 2주일 만에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그 모습에 얼마나 고마운지 "배추가 살아났어요!"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싶었다.
떠나버린 줄 알았던 배추가 살아났다
무와 배추 모종은 대부분 살아난 듯했다. 아직 기운 없이그대로인 배추 모종은 3개 정도였고, 나머지는 손바닥 만하게자랐고속잎도여러 장 올라왔다.
바짝 마른 밭에 물조리개로는 충분히 물을 줄 수 없어, 고무 호수를 연결해 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름이 남은 밭에 가을 채소가 자리 잡는 데는 물 주기가 중요한 듯 했다.
밭에 물 줄 땐 먼저 뿌리가 있는 흙을 충분히 적시고 나서, 비를 뿌리듯 잎사귀 위로 살살 물을 뿌려주었다. 그때마다 배춧잎에 물이 떨어지며"쏴아"경쾌한 소리를 냈다. "나 괜찮아요!"라고배추가 대답하는 듯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오락가락하던 날씨도 얌전해졌고, 아침저녁 서늘해져 배추가 좋아하는 온도가 맞춰진건지잎은도톰한 힘이 느껴졌다.
시장에서 파는속이 찬 김장배추를 내손으로 수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가 제대로 커주면무청을 시래기로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뭔가 좀 아쉬웠다. 고추를 따고 나니 수확할 채소가 없었다. 깻잎도 녹병이 번져서 먹을 것이 없었다. 깻잎 대신 하모니카처럼긴꽃대가 생기고 있으니, 조심스레 들깨 수확을 기대해보기로 했다.적상추는배추 눈치를 보는지 좀처럼 잎이 커지지 않았다.봄에 수확해서 먹던 잎채소는 이젠 멀어진 듯했다.아니면 배추처럼 뿌리 내는 것이 쉽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분양 밭은 텃밭은 11월 중순이면 정리가 된다고 예고가 있었다. 이제 두어 달 남짓 남은 기간동안 빈틈없이 풀가동을 해야 했다.끝나기 전에 밭은 빈자리 없이 작물들을 심고 싶었다.
쪽파 종자를 구해서 텃밭 가장자리에 둘러 심었다. 그리고 빈자리엔 총각무 종자를 심었다. 욕심이 과했는지, 서툰 손은싹이 뭉쳐서 올라오게 했다. 자주 속아주며 어린잎은 나물로 먹으면서 실한 총각무를 키워봐야겠다.
밭은 빈자리가 없다
봄에 먹었던 얼갈이배추는 속이 차는 것이 아니니 어느 정도 자라면 억새지기 전에 뽑아 먹었다. 오크 잎 상추나 로메인 상추는 잎을 뜯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인지 김장배추가 자라는 걸 그냥 지켜보는 것이 어색했다.잎이 손바닥만 해지면 뜯어먹던 생각이 자꾸 났다.배추는 잎채소이긴 하지만 속잎이 다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확을 한다.가을밭은 수시로 수확하는 재미는 없어졌지만, 이제 막 뿌리를 내린 배추가 얼마나 통통해질지 기다려봐야 했다.
밭에 물을 주고 나면 구경 말고 할 일이 없었다. 이 밭 저 밭 구경을 나섰다. 우리 밭 배추보다 두배는 더 큰 밭도 있고, 무청이 팔뚝 길이만 하게 자란 곳도 있었다. 자꾸 다른 밭에 배추가 더 커 보였다. 모종이 무사했지만 뭔가 뒤쳐진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배추가 속이 안차면 '겉절이를 해 먹으면 되지!쌈채소로 먹으면 되지!'괜히속마음만소심해졌다.
동네 화단에도 배추가 큰다.
유치원 텃밭에 크는 배추는 올망졸망 귀엽다.
그나저나 너무 배추만 신경썼나? 텃밭에 가지 않았는데 내 눈엔 배추가 자꾸 보였다. 동네 화단에 배추 모종을 누가 싶었는지, 벌써 얼굴만 하게 자랐다. 배추 사이에 심은 상추도 우리 밭 상추보다 더 잘 자라는 듯 했다.
마트 가는 길에 동네 유치원은 마당이 훤하게 들어온다. 그 앞을 지나다 깜짝 놀랐다. 언제 심었는지 텃밭상자에 자란 배추가 너무도 탐스러웠기 때문이다. 고사리 손으로 키운 배추가 내 것보다 훨씬 크고 좋았다.
간절히 바라던 텃밭을 갖게 돼서 신이 났었다. 초보 텃밭 주인이지만, 큰 수고 없이도 밭에서 주는 대로 덥석덥석 잘 받아먹었는데 가을 채소를 심고 나선 '욕심'이 생겼나 보다. 배추는 열심히 속을 채우기 위해 자라고 있는데, 밭주인은 다른 밭이나 기웃 거리며 비교만 하고 있었다. 자꾸만 남의 배추가 더 커보이고 부러웠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는건 아이들도 싫어 한다. 나 역시 다른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것이 싫고, 기분이 유쾌하지 않는건 마찬가지다. 아직 다 크지도 않은 배추에게 미안해졌다. 배추 모종이 김장배추가 되기 위해 열심히 크는 동안만이라도, 쓸데없이 비교하려는 마음을 멈춰보기로 했다.
텃밭이 알려주는 대로나는 하나씩 배우고 있는 듯 하다.착한 텃밭은잔소리도 안하는데, 항상 날잘도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