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내 일상을 나만의 것으로 채우고 싶어졌다. 오래된 내 역할 중에 나와 거리가 먼 일부터 정리하고 싶었다.
그중에 가장 오래된 역할은 바로 장녀라는 자리였다. 장녀라는 이유로 가족 일에서 '작은 엄마' 같은 역할들을 해왔었는데 그만 두고 싶었다. 팬데믹 시대에 만남을 줄이고 전화 안부를 묻는 일을 권한다고 하지만, 난 전화 안부를 끊었다. 친인척 일가에 대한 여러 관심을 끊고, 가족들과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안부전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때가 되면 안부전화를 드리고 애로사항을 듣는일을내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매일 전화하는 착한 큰딸이었으니, 제주와 서울이란 공간도 상관없이, 부모님의 일과를 매일 업데이트할 수 있었다. 집안 대소사엔 늘 축의금, 부조금,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친지들의 일도빠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선 장녀는 이제 할 일이 없어졌으니 그만두자고 했다.
왜 그렇게 타인을 신경쓰는 삶을 살았을까? 장녀로 살던 시간을 빼버리면 큰 문제가 생길까 봐 그랬나?
이젠 가족들에게 거꾸로 별일 없이 오는 안부전화를 받는다. 먼 사촌부터 동생들까지 잊어버릴 만하면 연락이 왔다. 전화 첫마디가 " 왜 연락 안 하니?"였다.
그래서 답을 준비했다.
" 바빠 전화할 시간이 없어, 나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엄마야."
내 대답이 우습고 농담처럼 듣겠지만, 사실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다. 모든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람이라고 느껴졌던 일들을 떼어놓고 보니 그다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나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는정말 바쁜 사람이었다. 정확하게엄마 역할을 하는 모두가 바쁜 사람일 것이다. 바빠서 시간 없다는 말은 엄마들 앞에선 무색한 듯하다.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데도 죄책감이 들고, 일을 하는 동안 가족위해 시간을 온전히 쓰지 못하는 걸 항상 미안해한다.그동안 남들도 다 하는엄마 노릇이 쉽지 않아도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하던 나였다. 그런데 사실 속마음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하다'는 말 대신 당당하게 말한다.엄마라서 바쁘니, 잠시 엄마 역할해야 한다고 말이다. 늘곡예를 하듯 변화무쌍한 엄마 역할이 나는 가장 어렵다.
그래도 희망은 생겼다. 장녀역할이 줄어든 대신 글 쓰는시간이 좀 늘어났기 때문이다.
가까운 가족이나 타인을 챙기려는 마음을 줄였지만, 여전히 엄마 역할은 휴식시간이 거의 없고, 글을 쓸 시간은 항상 모자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