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위로, 만성질환에 지친 감정 돌보기
꽃의 위로
자연에서 받는 위로는 나에게 딱 맞는 약이었고,
매일 먹는 갑상선 호르몬제만큼 효과가 좋았다.
나는 꽃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 동네에서 찾을 수 있는 꽃밭은 꽃이 없어질 때까지 여러 번 간다. 매일 같은 꽃밭을 갈 수는 없지만 꽃이 많은 봄과 여름 사이엔 사진을 찍을 기회가 많다.
꽃을 찍다 보면 내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만난다. 보통은 꽃을 좋아하는 분들이라 꽃 이름을 물어보거나, 예쁘다며 함께 공감해 주는 편이다. 가끔은 투덜대며 그런 건 왜 찍냐며, 더 예쁜 걸 찾아 찍으라며 조언도 해준다. 꽃보다는 물 위에 노는 청둥오리 한 쌍을 찍어보라는 분도 있었다. 둥굴레 꽃을 찍다가 둥굴레 뿌리를 캐는 도둑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둥굴레가 오래된 가로수 아래 자라고 있었는데 씨앗을 뿌린 주인이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내가 뭘 찍는지 궁금해하는 일도 더러 있었는데, 묻지 않아도 꽃 이름을 알려주기도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꽃을 찍는 일에 훈수를 하는 듯 말을 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는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시 말동무가 필요하거나 외로운 구석이 있는 분들은 아니었을까 싶어졌다.
한 번은 동네 공원 꽃밭에서 백일홍(백일초)을 찍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나를 빤히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그 꽃이 예뻐요?"
"..."
"난 하나도 안 예쁜데...
나도 어릴 때는 꽃을 따기도 하고, 갖고 놀았지만... 몸이 아프니까 꽃도 다 소용없어! 뭐가 예쁘다고 사진까지 찍어요? 몸이 아프면 다 필요 없다고!"
"..."
(진짜 어디가 많이 아프신가? 대답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할 말이 끝나면 자리를 뜨겠지 싶었다. 사실 나는 사진을 더 찍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눈은 충혈되어 피곤해 보였고, 피부도 거칠고 힘이 없어 보였다. 하마터면 '혹시 갑상선이 안 좋으세요?'라고 물을 뻔했다. 처음 보는 내게 짜증을 내다니 잠시 놀라 멍했지만, 곧 화가 나고 억울해졌다.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저도 몸이 안 좋아요. 매일 약 먹으면서 치료 중이라고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갑상선기능저하증 때문에 호르몬제를 먹고 있지만, 그때는 별 차도 없이 피곤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꼬박 밤을 새우고 낮잠을 자지 않으려고 꽃을 보러 나온 참이었다. 나도 아픈 사람이라고 달려가 따지고 싶었다.
백일홍 2020.8.8갑상선이 망가지고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은 잠이고, 가장 많이 줄인 것은 말이다.
직장에선 하루 종일 외부 미팅과 회의가 대부분인 업무를 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병원 의사에게 말하는 것 말고는, 병에 대해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은 진작 포기했다. 주변엔 나와 같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명해도 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고요한 침묵의 시간은 내게 가장 좋은 치료 약이었다. 꽃을 만나며, 즐기는 침묵이 갑상선을 더 아프게 하지 않는 듯했다.
한 여름 집 주변에 백일홍 꽃밭을 몇 군데 찾았다. 강렬한 자외선이 두렵기는 하지만 시간이 될 때마다 그곳으로 갔다. 백일홍은 봄부터 여름까지 뜨거운 태양에도 건조한 공기도 잘 견디는 대단한 야생화였다. 겹겹이 꽃잎이 천천히 펼쳐지고 나면 꽃 중심에 꽃술들이 하나씩 씨앗을 만들어 내는데 꽃을 보는 동안 재미가 놀랍기만 했다.
아파트 베란다에 키우던 백일홍
작가 헤르만 헤세가 평생을 정원을 가꾸며 살았는데 그의 책 <정원일의 즐거움>에는 백일홍 이야기가 실려있다.
"꽃이 시드는 것, 장미 빛이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온갖 생명과 모든 아름다움의 비밀로서 함께 체험하도록 가르쳐보게나. 그들은 놀랄 것이네!"
"날씨가 나쁘다거나 몸이 아프다고 해도 깨지지 않는 행복이야말로 최고의 행복,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행복이지. 열정적으로 일하며,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생산해 내는 것 말일세. 그게 무언지 아직은 상세히 자네에게 말해 줄 수 없어, 몇 년이 지나고 나면 함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걸세."
그리고 덧붙여 그는 말한다.
"오늘날의 질병이 내일의 건강함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로로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네 안에서 다시 한번 깨어나게 될 걸세"
헤르만 헤세의 글은 노년의 원숙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말년에는 정원을 가꾸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집필활동과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한 그가 부럽기도 했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장담할 수 없지만, 책 속에 그의 삶을 보면서 나에게도 찾아올 노년의 시간을 상상해 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질병은 늘 따라다닌다. 아프다가도 회복하고, 건강하다가도 갑자기 병이 찾아오기도 한다. 삶은 탄생과 소멸이 함께 존재하며, 예측하지 못한 일들은 한순간에 재앙이 되지만 지나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평화로워지기도 했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이란 병을 알게 된 후 3년간은 끔찍했지만, 약을 먹으며 그럭저럭 지내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 책을 살 때까지만 해도 어떤 일을 하고 살면 좋을지, 무엇을 하면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갑자기 찾아온 병이 무서웠지만 내게 알려준 것이 있다. 스스로 찾지 않으면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것이 바로 행복이란 것을 말이다.
내가 사는 도시는 얼핏 봐도 빌딩 숲이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공간, 버려진 공터, 허름한 건물 사이, 흙이 뿌려지고 깨진 틈에 야생의 존재가 있다. 작고 소소하지만 길가의 꽃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를 위로하는 것들은 완벽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존재들에게 동지애가 느껴졌다. 아픈 존재들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도심에 살아 있는 자연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의 대부분은 괴로움이지만 날마다 새롭게 핀 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꽃 사진을 찍는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다. 길가의 꽃들은 언제든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 핀 후 지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사람들 손에 사라진다. 예쁜 야생화일수록 위험하다.
꽃 사진을 찍는 타이밍은 무척 중요했다. 꽃봉오리를 발견하고 꽃이 필 무렵 맞춰 간 줄 알았지만 시들어 허탕을 쳤다. 장 보러 가는 길에 본 꽃이 집으로 오는 길엔 사라지는 일도 흔했다. 늘 만나는 꽃들이 마지막 모습일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배운 것도 있었다. 백일홍은 시들어가면서 꽃씨를 만든다. 꽃과 나무가 그러하듯 살아있는 존재들은 소멸하면서도 행복한 미래도 남겨둔다는 것을 말이다. 자연에서 받는 위로는 아픈 나에게 딱 맞는 치료제였고, 언제나 부작용이 없었다. 어쩌면 내게 찾아온 질병도 자연의 계절처럼 겪어내야 하는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관문의 시간임을 말이다.
아마도 꽃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내 몸의 생기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그때였다. 금방 시들어 버리긴 하지만 피어있는 동안 꽃은 '있는 그대로'였다.
아파트가 세워지기전 구옥에 핀 백일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