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장아장 솟아나던 야생초들이 어느새 우람한 풀숲이 되었다.수북해진 화단을 정리는 기계소리가 요란했다. 벌써 제초작업을 하다니 아쉬웠다. 서둘러 손을 데지 않은 꽃밭을 찾아가야 했다.
그늘진 아래 향긋한 아까시 꽃이 뿌리는 골목을 지나니
꽃나무들이 뿌려놓은 시든 꽃잎을 그대로 둔 채 야생초들이 만든 꽃밭이 있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나무 아래 그만큼 싱그러운 풀밭이었다. 꽃이 떠난 나무들은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워졌다. 야생초와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내는 초록향기가 좋을 뿐이었다.
요즘처럼 내리쬐는 태양과 온기를 품은 대지가 한데 어우러져 따끈하게 섞이는 계절은 어디를 가든 만족감을 준다. 바람마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쾌함 속에 봄이 데리고 온 에너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따사로운 봄날 어깨 위로 내리쬐는 태양의 온도를 느끼면서 나선 산책길은 보양식처럼 뜨끈하게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근무 중이라 예전처럼 한가로운 산책은 어렵지만 점심시간 잠깐 나와 걸으며 태양열이 충전하는 잔잔한 풀잎 파도 속에서 반가운 봄망초를 만날 수 있었다. 꽃마리가 흩어 놓은 화단에 곧게 선 봄망초 무리가 타고난대로 자신을 드러낸 아우라가 맘에 쏙 들어왔다.
키가 큰 봄망초는 어디서든 먼저 눈에 띈다. 개망초보다는 향기가 덜하지만 분홍빛이 되는 꽃봉오리는 아무래도 미워할 구석은 없는 것 같다. 작은 데이지꽃과 비슷한 듯해도 야생에서 가장 터프한 녀석이다. 제조 작업이바쁜 손은 벌써 봄망초만 골라서 군데군데 눕혀 놓았다.그래도
운 좋게 봄망초 꽃밭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귤밭에서 놀다가우뚝 솟은개망초를발견하면 한 손으로 줄기를 잡고 쑥 뽑아서 미련 없이 돌담에 올려두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따라 나오는 뿌리는 작고 순했다.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다니면 말보다 먼저 배웠나 보다.씨앗을 잘 뿌리는 특성을 가져서 인지 꽃이 피면 아버지는 보이는 족족 뽑아내셨다. 귤밭 어디서든 솟아나면 달려가 뽑아야 했다. 꽃이 피면 곧 씨앗을 뿌릴 테니까 말이다.
저렴한 기억에 어린 내가 개망초를 뽑는 걸 보며 고모들이 시시덕거리며 웃으셨다. 자기 키만 한 풀을 한 손으로 뽑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꽃은 예쁘고 향기로웠지만 난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없어야 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그냥 두지 말아야 할 것 말이다.꽃이 나와 신세가 비슷하다는 기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미운 존재였다.
어린 시절 내 허리만큼 한 개망초꽃을 참 많이 뽑았다. 그래서일까. 뿌드득 뿌리가 빠져나오며 내는 소리와 뽑히는 손맛은 지금도 남아있다.
이상하게도 한 번에 쏙 뽑아지는 짧은 뿌리를 가져서 인지 농사짓는 아버지는 그 꽃을 미워하지 않으셨다. 때론 반가운 마음에 꽃을 뽑아내는 듯하기도 했다. 오히려 작고 귀여운 덩이괭이밥이나 토끼풀을 더 싫어하셨다. 땅 위로 올라온 모습만으로는 뿌리가 얼마나 질기고 깊게 뿌리내리는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속 마음처럼 말이다.
오락가락하는 얼굴표정을 살피며 좋은지 싫은지 가늠해 보는 버릇은 그때부터였나 보다. 아무리 잘 보이려고 해도 나를 봐주지 않았다. 언제쯤 마음에 들 날이 올까 노심초사하고 바둥거렸지만 끝내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때론 혼이 나고 나서 화풀이처럼 개망초를 찾아다녔다. 확 하고 뽑아 내팽개치며 미운 마음을 버리고 싶었다. 나는 왜 나를 세상에 나오게 한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지내는 동안 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싫었다.
싫어한다는 말에 반대말은 좋아한다일까?
문득 '싫어한다'는 단어가 생경하게 느껴져서일까. 의미를 찾고 싶어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싫어하다 : 싫게 여기다
뜻을 읽었지만 의미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싫어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을 찾았다.
꺼리다, 기피하다, 미워하다, 멀리하다, 혐오하다
누가 봐도 싫다는 건 거리를 둔다는 물리적인 거리 혹은 차단이란 벽이 존재했다.
나를 꺼리는 듯한 눈초리를 '싫어한다'라고 해석해도 될까...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장벽은 굉장히 뚫고 들어가기 어렵고, 섞이지 않는 공기를 느꼈다. 합쳐지지 않아서 따로 도는 불편함이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좋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아이들에게 느끼는 감정, 남편에게 끌렸던 감정을 떠올려보았다.
좋아하다: 일이나 사물 따위에 대하여 좋은 느낌을 가지다.
반기다. 가까이하다, 아끼다, 잘하다
좋아하다는 의미는 그냥 알 수 있었다. 내가 꽃을 좋아하는 것처럼 확실하게 나는 좋아하고 반기는 의미였다. 그러니 그 반대의 신호도 틀리지 않다는 걸 믿어야 했다. 싫어하고 기피하고 꺼리고 멀리하고 혐오하는 듯한 관계를 끊어내 버렸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심리 상담사가 말한 10년이란 시간 중에 겨우 5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달라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절반까지 끌고 오는 동안 가장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아무렇게나 핀 야생화들이 깔린 시골 과수원에서 이리저리 탐색을 다니던 나를 기억한다. 누가 안아주지 않아도, 누가 부르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며 자연을 그대로 만끽했다는 것을 무척 고마운 일이었다. 정서적인 결핍은 대자연의 풍만한 가슴으로 안아주었으니, 나의 감성은 꽃을 보면 되살아 났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지만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으면 나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뒤죽박죽 떠오르는 풍경 속에 무서운 얼굴들이 보이지만 꽃으로 금방 감출 수 있었다. 그러니 야생화가 핀 도시에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나 보다.
길가의 야생화들을 아끼다 보니 나를 미워하던 마음도 바뀐 듯싶다.
세상에 사랑받지 못할 존재는 없었다.
모두가 가치가 있고, 어떤 것도 싫지 않았다. 모든 꽃이 다 꽃이듯,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이었다. 나를 멀리하고 자신을 혐오하던 마음은 거짓이었다.
나의 본심을 알게 되어 무척 울컥했다. 익숙해져 버린 과거를 놓아버리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잠깐의 고통이었다.
이별은 당연히 슬픔을 불러온다는 것을 인정하니 완벽하게 정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멀어지면 치유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곁에서
슬픔을 차갑게 냉각시키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겠다는 욕구도 사라져 버렸다.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인정욕구를 가까이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졌다. 의지처가 되는 것은 바로 나뿐이었다.
마음속에 시끄럽게 떠들고 파도치던 소음들도 희미해져 갔다. 대신 아무 때나 허락하는 산책을 하면서 자연이 주는 풍경 속으로 몸을 담금질했다. 자연과 연결된 기분은 완전히 나를 반짝이는 존재로 바꾸어 주었다. 내가 야생화가 되었다가 나무가 되었다가 지나는 바람이 되었다가 온갖 풍경에 연결된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흐린 날에도 태양이 나를 늘 비추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를 위해서 사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늘 나 자신에게 물었다. 누구와도 나누지 않아도 충분히 진정되었다.
다음 휴일엔 화단은 정리가 되어 있을 테니 서둘러 봄망초에게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나를 좋아하지 않아 속상했지만, 사실은 싫어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내가 품고 있었던 불편함을 끝내기 위해서 도시의 야생화 지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기로 했다.
"들어오지 마시오."
그리고 말했다.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잘 지내라고 말이다. 나는 세상과 멀어진 것도 아니었고, 또한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것도 아니었다. 온전히 나였다.
꽃이 시들고 사라지 듯 어떤 관계는 죽어가고, 새로 싹튼 관계는 성장해 가는 것이었다. 내게는 어둠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자연은 늘 내게 시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의 야생화를 찾아다니며 나도 자연의 순리에 동화되고 있었나 보다.
귤밭에서 개망초를 그렇게 뽑아버렸지만, 어여쁜 봄망초로 도시에 사는 나를 찾아와 말을 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필코, 나 자신이 되세요."라고 말이다.
전에는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꽃의 작별인사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제초기계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