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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Apr 25. 2024

기회를 놓친 것 같은 너에게

등꽃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에서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창밖에 내다보이는 풍경이 지루할 때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허름한 집 몇 채, 낡은 주유소가 산 아래 있는 얕은 야산은 보라색 등꽃이 뒤덮여 큰 무덤처럼 보였다. 꽉 찬 꽃송이가 향기로운 바람을 품고 있는 그 산 위에 눕고 싶었다.  마침 신호가 오래 켜지지 않아서 잠시 더 꽃구경에 황홀해졌다.

서로 엉키고 엉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무줄기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등나무가 몇 그루가 살고 있는 걸까?


아무도 위로가 되지 않는 걸 꽃이 아는 듯 아무 말도 필요 없다며 늘어진 팔이 폭안아주는것 같았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땀 냄새가 나는 것 같더니 어느새 내 몸에 등꽃향기가 감싸고돌았다. 술을 더 굳게 다물었다.


좀 힘들었지만 마음은 향기로웠다. 시작은 늘 쉽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등꽃이 산처럼 쌓인 풍경에 빠져 걱정은 바라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등꽃이 다 시들어 갈 때까지 나는 그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봄 한철이었다.


한동안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아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 하나씩 경험할수록 꽃을 발견하듯 묘한 수집욕이 느껴졌다. 시간을 수집하는 것은 20대로 끝이라고 믿었던 꼰대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곳엔 늘 예상하지 못한 선물도 기다렸다. 보기엔 쉬워 보였던 것들이 사실 어려웠고, 어려운 것 같던 일은 할 만했다. 흔하게 핀 꽃이 아니라 어렵게 핀 야생화가 눈길을 사로잡는 듯 더 깊게 들여다보는 세상은 더 경이로웠다.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걷기도 했지만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산책도 무척이나 스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예쁘게 핀 꽃을 발견하기도 하니 말이다.


 등나무가 산을 덮은 곳을 내가 지나갈 줄을 몰랐지만, 등꽃이 산을 뒤덮은 순간엔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얻는 것도 있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무슨 꽃을 본 이야기가 거창하냐 싶겠지만, 나는 등나무꽃을 볼 때마다 그날의 희열을 그대로 불러와 나를 기쁘게 해 준다. 꽃 하나에 사연이 또 추가되었다.


 으로 나갈수록 야생화지도는 너 확장되었다. 나의 시야도 확장이 필요했는지 점점 벗어날수록 나는 더 가족의 품이 좋아졌다. 애정에도 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한동안 잊고 지내다 제철에 핀 꽃을 만나 반가운 마음처럼 나의 외출도 점점 과감해졌다. 내면의 저장소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꽃들마다 사연들이 하나씩 짝꿍을 만들어 외롭지 않다.

 

꽃을 보고 싶어 하는 내 눈엔 어딜 가도 꽃이 피어있었다. 그러니 낯선 공간도 낯설지 않았다.


2024.4.19


사실 등꽃은 봄꽃들을 구경하느라 놓치고 지나치기 쉬운 꽃이다.  파리와 꽃이 함께 피니 꽃을 찾아보지 않으면 보기 쉽지 않다. 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사니 잘 살피지 않으면 꽃을 보지 못했다. 나마 향기가 뿌려주면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듬어 볼 여유가 없었다. 꽃을 알기 전엔 더 그랬다. 그저 꽃이 피었을 뿐이었다.  


 등나무는 오래된 학교나 공원에서 볼 수 있지만 흔한  꽃나무는 아니다. 동네에는 공원 산책로에 유일하게 한그루가 있었다. 산책로에 벚꽃이 지고 장미덩굴이 새잎을 뻗어낼 때 등나무는 꽃과 잎을  피워냈다. 향기도 좋지만 나무 얼개 사이로 내려온 연보라색 꽃송이가  바람에 찰랑찰랑 빛이 났다. 꽃송이가 탐스럽게 줄기를 내린 모습을 손으로 잡아보고 싶어 뻗어보지만 쉽지 않았다. 나보다 늘 높은 곳에 있는 탐내지 못하는 존재 같았다. 그래서 더 쳐다보게 되는 꿈처럼 말이다.


 그 아래 잠시 앉아 향기를 온몸에 스며들게 하고 싶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향기에 취해서 평소에 겁이 많던 아이가 과감해지는 상상을 했다. 일단 부딪쳐보지 뭐. 넘어지긴 해도 죽지는 겠지 뭐.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오래 머문 자리에선 향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이 쓱 밀어주던지 내가 움직여야 했다. 아무리 좋은 시간도 멈추게 할 수 없듯 나는 나아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등나무꽃 @songyiflower인스타그램

 동네 꽃 명당은 줄줄이 외우고 있는데, 에서 좀 떨어져 있고 자주 가지 않는 산책로시간을 맞춰 가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를 보고 '아차' 하기  십상이었다. 

 그런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필 시기를 맞춰 찾아왔다고 좋아했는데, 나무를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며칠 전 꽃을 보러 왔을 때  오래된 벤치를 수리하나 보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벤치와 등나무가 얹어진 무 가림막을 철거했던 것이다. 나무 가림막이 집이었던 등나무 밑동이 잘린 채 그루터기만 남았다. 그 자체로 초록쉼터였던 등나무 그늘이 공원이 새 단장을 하면서 그늘막이 없는 새 벤치로 바뀌었다.  


  '꽃이라도 다 보게 해 주지' 덩그러니 남은 그루터기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다시는 갈 수 없는 시간, 등나무꽃을 처음 사랑하게 되었는데 또 보지는 못했다. 한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나만아니었다. 그 누구도 시간을 붙잡고 살지는 못다. 그 등나무도 그랬다. 그 끝 모두 같았다. 누구 언젠가 끝을 보아야 하듯 등나무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만개한 등나무 꽃 @songyiflower 인스타그램

 시는 못 만날 것 같던 인연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금은 절의 시계대로  딱 시간에 맞추어 일제히 등나무 꽃이 었다. 로 이사 온 동네 등나무만 따라서 산책해도 족히 한 시간을 향기롭게 걸을 수 있다.  한겨울에 이사 와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아파트 단지마다 등나무 벤치가 있고, 집 앞 학교엔 근사한 등나무 꽃이 한창이다. 날마다 산책을 가는 공원에도 철재 울타리 위로 막 피어난 꽃과 이파리가 눈이 부실 지경이다.

 등나무가 딸린 벤치를 따라 걷다 보면 하루 만보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지칠 땐 잠시 벤치에 앉아 여유도 부릴 수 있으니  등나무 벤치를 따라 산책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벤치에 앉아 올려다보니 연둣빛 이파리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연보라색 꽃은 땅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에게 말해주는 듯하다.

"기회는 또 있어!

  조바심은 늘  따라다니고 이별로 인한 은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난다.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등나무 꽃만이 아니란 걸 잊고 있었다. 그래도 또 기회가 올 거라고 믿어야 한다는 걸 배운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니 잡으려면 매일매일 노력을 거르지 말아야 한다. 로운 인연은 새로운 곳에서 출발하니,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으로 가보면  기다렸던 꽃을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매년 새로운 곳에서 등나무꽃을 만나고 있다. 등꽃으로 뒤덮인 산 이 계절엔 다른 곳에서 만날 기대를 품는다. 발견은 내 몫이니까.


예전에 보았던 등나무가 우거진 산은 그대로 있을까?

이젠 장소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출근 중이다. 점심시간 잠깐 산책을 나선 공원에서 막 피기 시작한 등꽃 두 송이를 발견했다. 알록달록 철쭉사이로 똑같은 꽃송이가 탐스럽게 향기를 뿜고 있었다. 줄기는 늙었지만 가지는 누군가가 매만진 듯 짧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래도 꽃의 시계는 정확하게 계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만났지만 나는 등꽃을 너무도 잘 안다. 이맘 때면 지친 나를 만나러 와주는 의리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에 등꽃을 보던 내가 아니었다.

두 송이 등꽃이 전해준 꽃향기는 오후 내내 나를 지켜주었다.

 

등나무는 혼자 설 수 없는 나무다. 어디든 기대어야 하는 덩굴이다. 강인한 덩굴은 뻗어나가지만 혼자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벽이나 지지대에 기대는 것을 그다지 부끄러워 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다른 나무에 기대든 하다 못해 바닥에 누워있던, 자신의 몸에 스스로 감든 등나무는 최선을 다한다. 꼿꼿한 느티나무처럼 생기지 않는 자신을 탓을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꽃은 왜 피는 걸까?
나는 주로 길가나 주변에 피는 야생화를 쫓아다닌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꽃이 핀 곳을 찾아 걷는 것을 즐겨한다.
 야생화들은 꽃이 피기 전엔 잡초처럼 풀포기로 보이지만, 꽃이 피면 꽃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꽃봉오리가 터지는 순간 대단한 성취를 목전에 두게 된다. 바로 씨앗을 만들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야생초 중에는 꽃송이 하나가 수백 개가 넘는 씨앗주머니로 변신하는 것도 있어서 그 번식욕구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일 년생 보통 한해살이라고 불리는 화초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만들고 생을 마감한다. 씨앗에서 시작해서 씨앗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씨앗하나에서 발아된 싹은 새로 여러 송이의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우고 나면 처음 심은 꽃씨보다 많은 씨앗을 받을 수 있다. 백일홍이나 분꽃은 집에서도 쉽게 키울 수 있는데, 한번 키워보면 꽃이 피고 씨앗을 맺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꽃송이에서 씨앗이 만들어지기까지 꽃잎, 줄기, 뿌리까지 모두 소진해 버린다. 씨앗은 여물어 알이 차지만 뿌리까지 바짝 말라 바스락 거리며 부서졌다. 스스로 완벽한 흙(부엽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해살이는 씨앗을 계속 불려 가면서 자손을 다시 탄생시킨다.

 특히 향기가 근사한 분꽃은 꽃잎을 떨군 자리에 검고 통통한 씨앗을 남겨주는 정직한 씀씀이를 가졌다. 그래서 보상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나를 안심시켜 준다. 나는 매년 백일홍과 분꽃을 화분에서 키우고 꽃씨를 받아 다음 해 다시 심어 꽃을 본다. 한해살이 꽃은 매년 같은 꽃이 피지는 않지만, 항상 꽃을 보여주며 나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나의 유일한 선생님이다.


 해살이와는 달리 여러해살이 화초들은 장인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화는 일 년 동안은 꽃도 없이 이파리만 무성하다가 그다음 해에 꽃을 피운다. 오랫동안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겨울 동안 줄기를 모두 걷어내고 납작한 잎들을 둥글게 피어 로제트(장미 꽃잎 같은) 모양이 된다.


  한국의 토종 야생화 중 하나인 벌개미취는 이파리와 줄기가 모두 사라진 듯 땅속뿌리만 남는다. 뿌리는 죽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초는 온실에선 쉬지 않고 꽃을 피우지만, 실외에선 덩이뿌리만 남아서 월동을 하고 다시 봄이 되면 풍선을 불어놓은 듯 풍성해진다. 사람이 제각각이듯 식물들도 모두 다른 스타일로 삶을 살아간다.

 

  꽃은 혼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기도 하지만, 곤충이나 새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수정이 반드시 필요한 식물들은 자신들에게 딱 맞는 조력자가 있어야 후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치장을 하고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꽃송이 속엔 수술과 암술, 꽃가루, 꿀처럼 살림살이가 들어있다. 자신에게 가장 맞는 곤충이 와주길 기다리며, 잊지 않고 자신을 찾은 손님에게는 꿀이나 꽃가루 같은 답례품도 준비해 둔다.


식물에게 꽃은 살아가는 이유, 그러니까 후손을 남기는 일에 꼭 필요한 도구예요. 꽃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상징이 아니에요. 식물이 살아남고자 애쓴 흔적이지요.
<꽃 해부 도감>


   식물로 살아가는데 꽃이 꼭 필요한 도구라는 것에 나 역시 동의한다.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만들고 견디는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을 피운다는 건 쉽지 않은 과정들을 거치고 난 후 결과를 표현하기도 한다.

 내 삶은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할까?

식물의 삶에서 도구로 쓰이는 게 꽃이라면, 내 삶의 도구는 글쓰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활짝 핀 꽃을 누군가가 찾아내듯, 내 글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는 지도. 무엇보다. 내가 어디를 가든 어떤 결정을 하던 꽃 길 위에서 향기로울 것이다. 시에서 살아남은 등나무는 세월의 굴곡을 몸에 새긴 채 꽃을 피고 있다. 굴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향긋한 향기를 은은하게 풍기면서 말이다. 그를 닮고 싶다. 주름 잡힌 등나무 줄기를 보다가 동시에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붉은 손등은 아무리 봐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

 

 출근길 머릿속에서 걷는 도시의 야생화지도는 늘 지금을 일깨워준다. 꽃하나가 지고 나면 또 새로운 꽃이 핀다. 아직은 이별이 아쉽지만 지금 나는 무척 향기롭고 자신감 넘치는 등꽃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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