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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Jun 06. 2024

아무것도 하기 싫은 너에게

장미덩굴

매주 수요일 알람을 맞춰 놓았다. 내일 발행일이라고 말이다. 늦은 오후가 되면 브런치에서도 알람이 온다. D-1일이  라며 써놓지 않았다면 얼른 시작하라고 다독여준다. 독자들에게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아직도 어색하다. 연재를 하고 있지만 사실 시험 전날 총정리를 하듯 전에 공부한 것들을 한눈에 보기 좋게 다시 쓰는 일이다.  이미 3년 넘게 브런치에 써놓았던 작은 조각과 매년 비슷한 꽃사진을 찍어둔 것들을 들추어내서 꽃송이를 피운다.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처음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할 때 이런 글을 쓰겠노라 약속한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도 못하고 반년이 흘러가버렸고, 일주일에 한 개의 글도 발행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공간이니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글을 읽은 독자가 아니라 나였다. 하고 싶은 기분으로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어느 날 흐릿하긴 해도 글자가 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주엔 글이 하나  써졌다. 신기하게도 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겨울이 오자 글쓰기는 속도가 붙었다.

 

그리운 마음은 유난히 감정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떠나보내고 나니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빈자리는 그래서 더욱 빛이 나는 것일까. 계절이 바뀌고 봄이 오면 다시 똑같은 꽃을 구경하듯 글쓰기는 비슷한 꽃다발을 만들었다.



 모처럼 공휴일 주말 근무가 일상이 되어 버린 나는 달력이 의미 없어졌다. 글쓰기가 다였던 시절에도 휴일은 따로 없었는데, 직장 생활은 나를 더 멀리 데려갔다. 그래서일까. 겨울처럼 꽃도 멀어져서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긴 산책을 나섰는데, 다녀오니 눈이 자꾸 감겼다. 꽃이 많아서 할 말도 많은데 낮잠이 쏟아졌다. 자고 일어났는데, 소나기가 지나가며 더 자라고 안심시켰다. 몇 시간을 게으름과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커피 한잔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은 겨울이 온 듯 적막함 느껴지고 침묵을 오래 붙들게 했다.


봄이 오기 전에 시작한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여름을 앞두고 있다.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여름이 너무 빨리 왔다. 봄 꽃이야기를 더 쓰고 싶은데 말이다.


6월이다.

6월은 꽃이 가장 많아서 가만히 집에 있지 못하게 했다. 매년 6월에 찍은 꽃사진이 넘쳐서 백업을 내놓고도 금방 용량이 찼다. 한 장소에서 보이는 대로 꽃을 찍어도 단숨에 여러 장이 되었다.


 장미꽃 덩굴을 보다가 색색이 나리꽃이 아래 낮달맞이꽃이 향기를 풍기고 토끼풀 사이로 꿀벌이 오락가락거렸다. 접시꽃이 피기 시작하니 태양은 여름을 더 당겨온 듯 목덜미가 뜨겁다. 나무들을 가지치기가 되고 잔디밭은 짧게 다듬어지고, 어지럽게 핀 야생초들을 말끔하게 정돈되었다.

 

 자귀나무가 달콤한 향내를 풍기며 작은 빗자루 모양을 한 꽃송이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몸집이 커진 자두알 아직 청매실처럼 푸릇한 색이고 보리수 열매는 절반은 노랗고 절반은 흐물 하게 붉어졌다. 루드베키아가 노란 머리를 늘어 뜨리고  검은 눈으로 태양을 마주 보는 길 위는 따가운 햇살이 금방 지겨워졌다.

 

 텃밭엔 키가 커진 상추모종, 고추가 달리고, 토마토가 익어간다. 들깻잎이 손바닥만 해졌으니 고소한 맛이 상상이 되었다. 한련화가 가득 찬 화분을 내놓은 집 마당엔 달리아가 가득 피어 있었다. 보라색 나팔꽃이 감아올린 지붕은 작년에도 비슷하게 덮었다.


동네를 다 돌았나 싶어 중랑천으로 내려갔다. 유채꽃을 파종한 곳엔 배추흰나비가 셀 수 없이 날아다녔다. 걸음을 따라오듯 나비 여러 마리가 빙글빙글 내 곁에 맴돌았다. 꽃길을 수도 없이 걸어 다녔지만 신비한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흰나비가 반짝이듯 날아다니고 지나는 사람들도 한동안 쳐다보느라 말이 없었다. 여러 가지 꽃들이 야생초 사이에 뒤엉켜 피어 있는데, 진한 분홍색 코스모스 꽃이 눈에 띄어 사진을 한 장 찍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천국 가세요."


뭐라고 했는지 다 알아듣지도 못했는데, 더 많은 말을 늘어놓았다. 난 코스모스 꽃을 더 찍고 싶었다. 그런데 쉽게 곁을 떠나지 않다.


"가시던 길 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눈을 마주 보고 또 천국을 말한다. 내가 아는 천국과 그 여자의 천국이 같은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아직 천국 구경은 멀었다 싶었는데, 나는 미리 준비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꽃밭에 핀 붉은 꽃양귀비가 말리는 것 같았다. 대답을 더 할 이유도 없었다.


겨우 그 여자를 돌려보내고 금계국과 개망초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휴일을 즐기고 싶었는데 괜히 봉변을 맞은 듯 기분이 상해 버렸다. 예전 같으면 눈도 안 마주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텐데, 대답은 왜 했나 싶었다. 그런데 또 그 여자를 만나야 했다.  


운동 나온 남자옆에 여자가 딱 붙어서 지나갔다. 남자는 웃기만 하고 여자는 중얼중얼 걸음보다 빠른 말로 따라갔다.

중랑천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강남역엔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나타난다. 그런 풍경은 그냥 지나가버리면 그만이지만, 느닷없이 나를 방해하니 화가 났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었다. 그냥 쉬는 것에만 매달리고 싶었다.  핑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상한 기분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좀 더 걸었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감정을 없어지게 할 것을 찾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택가가 모여 있는 산아래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단층 주택들이 정겹게 보였다.

 

 집집마다 텃밭이 있고, 꽃 화분이 없는 집에 없을 정도로 온 마을은 꽃길이었다. 그리고 골목 끝에 이르렀더니 붉은 미니장미 덩굴이 팔을 벌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봄 다녀갔지만 장미덩굴이 있는 줄 몰랐다. 붉은 벽돌이 차곡차곡 담장을 세운 집이 보기 좋아 부러운 눈으로 살피는 집이었다. 담장에 서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장미 향기를 맡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도 나의 일부였다.

계절이 바뀌고, 나의 일상도 달라졌으니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새로 그려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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