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쌍 Jun 13. 2024

기적을 믿는 너에게

능소화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기적이 없다고 믿은 것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 믿는 것


나는 어느 쪽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기적이 일어난다면 기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기적이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 솔직한 답이다. 내 존재가 기적이라고 믿지 않았고, 나는 불행하다는 전제가 밑바닥에 찰랑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 주변엔 반짝이는 것이 보이지 않았으니, 시선은 밖으로만 향했다. 사실 마당에 다이아몬드가 숨겨져 있는 줄 모르고 세상밖으로 나간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보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어느 쪽이었을까? 당연히 후자였을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것들 공식으로 만들었니, 적어도 내 기준에선 상대성 이론이나 물리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그의 천재성은 수치적인 것 이상에 신념과 철학을 품고 있었다. 복잡한 듯한 이론도 그의 방식대로 해석하면 어렵지 않았다.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금방 가지만 그 정반대의 경우 상상만 해도 지루하지 않은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은 잘못을 정말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맞다는 것이 오답이었다는 것, 답이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꼭 맞추어야 한다는 걸 눈으로 경험으로 체득하면 이전보다 더 똑똑해졌다. 시력이 좋아진 듯 더 잘 보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되니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아무것도 없는 빈노트에 글을 채워가다 보니 그런 신념은 더 강해졌다. 까맣게 무늬를 만들어 채워가는 글자가 문장이 되고 무늬처럼 새겨지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들었다.



꽃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누가 봐도 막 피어난 싱그러운 모습을 보면 나도 기운이 났다. 약을 먹어도 기운이 안나는 날이 더 많은 나였기에 길가에 만난 작은 꽃송이가 대견하고 부러웠다.  


 옴짝달싹 못하던 시절에는 담벼락 아래로 떨어진 능소화 꽃송이도 부러웠다. 마치 집을 나온 후 잠시 맛보는 자유를  능소화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동네 능소화나무가 있는 집은 세 곳이다. 몇 년 전부터 낡은 주택이 헐리고 신축빌라가 들어서는데도, 능소화가 있는 집은 그대로였다. 나무는 덩굴처럼 휘어지면 가지를 뻗고, 꽃줄기는 등나무 꽃처럼 아래로 길게 늘어지면서 여러 개의 꽃송이가 달린다.  능소화가 만개하면  낡은 벽에 꽃 장식을 두른 듯, 지나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여름이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능소화가 장맛비에 떨어져 바닥에 쏟아진 듯 쌓인 모습을 보려고, 주인이 집 앞을 쓸기 전에 가는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꽃송이는 통 잎이라 떨어진 모습도 사진으로 담기에 손색이 없다.


 능소화는 피어 있을 때나,
떨어진 모습도 사진을 잘 받는 꽃 중에 하나다.


 꽃을 쫓아다닌 건 꽃이 예뻐서였는데, 이제는 보이는 풀포기도 다 예쁘다. 사람들은 나이 들어 그런 거라지만 난 취향이 생긴 거라고 하고 싶다. 막 사춘기가 시작할 무렵 좋아했던 가수나 배우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다. 그들이  잘 지내는 걸 보면서.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내가 더 잘 아는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안부다. 집안일을 한 후, 커피 한잔을 들고 낮에 찍어둔 꽃 사진을 보는 순간 마법처럼 이동을 한다. 애인을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나와 연애를 하는 기분을 느낀다.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방의 취향이 전적으로 중요해진다.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고,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맞춰주는 쪽이 손해 본 것 같지만, 자로 재기 시작하면  로맨스는 사라져 버리니  무작정 나와 꽃을 좋다는 나는 연애를 한다. 나는 그녀의 취향에 빠진 채 올해도 잘 넘기고 있다. 다음엔 어떤 꽃 사진 이야기를 써볼까? 날마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것만 남기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여름이다. 능소화가 만개한 담장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곧 송이채 떨어질 능소화가 한꺼번에 핀 듯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능소화가 가득 핀 아치가 눈에 띄었다. 그 앞에서 꽃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딴생각을 하느라 그만 지나쳐 버렸다.


능소화를 보면 떠오르는 한 여인이 있다. 여인이라고만 하는 건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20년 전 살던 그녀에 대한 기록은 그녀가 쓴 편지 한 장뿐이다. 1998년 안동에서 택지를 개발하며 미라 상태로 여러 유물들이 함께 묻혀 있던 이응태라는 이 씨 집안의 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원본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부인이었던 그녀의 손 편지가 발견되었다.



무덤에서 발견된 편지 원본

종이 한 장을 채우고도 모서리 빈 여백에 써 내려간 편지는 쓰인 글만큼이나 슬프다. 종이가 한 장밖에 없던 것일까? 무덤 안에 그녀의 편지 외에도 가족들이 쓴 편지를 포함한  종이 다발이 있었다고 하니 서른한 살 남자의 죽음은 사연이 많은 듯싶다. 편지와 함께 짚신 한 켤레가 발견되었다는데, 아픈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머리카락을 섞어 만든 '미투리'라는 짚신이었다.


 원이 아빠에게 라며 시작하는 편지글은 뱃속에 아이를 가진 여자가 남편을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편지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편지와 신발 한 켤레는 슬픈 부부의 이별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편지를 모티브로 <능소화> 소설책이 나왔고, 능소화 속 전설 같은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듯 진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름 모를 그녀의 편지는 시간이 흘러 나에게로 왔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그녀를 잠시 그려봤다. 편지 속 손 글씨는 그녀의 얼굴이었고, 편지 속 글은 그녀의 인생을 담고 있는 듯했다. 쓰인 글이 갖고 있는 알 수 없는 마법은 편지 한 장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방금 전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 작년에 찍은 사진을 꺼냈다. 그런데 사진 속 바닥을 향해 늘어진 꽃이 그녀가 써 내려간 한 줄 한 줄 편지글처럼 보였다. 마지막 능소화 꽃이 떨어질 때까지 그녀를 보러 가듯  찾아가야겠다.


 태양이 내리쬐고 바닥에서 보글거리는 열기가 완전히 나를 녹였다. 땀이 흐르지도 않는데 얼굴을 익어가듯 뜨끈거렸다. 물 한 모금이 마시고 싶어서 멈춰 섰다. 그늘이 한점 없는 아스팔트에 서있는 나, 어디로 갈지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 건 황량한 곳 사람도 없는 건물빌딩 사이로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어디서 도망 나왔을까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 혼자였다. 유령이 득실대는 밤과 낮도 구분도 없는 곳에서 겨우 빠져나왔다고 안심했는데 왜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이 서글퍼 질까. 차라리 봄에 서둘러 나올걸... 태양이 드러누운 가을이라도 말이다. 무섭게 내리쬐던 날이. 너무도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고 움츠려 들었다. 여름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나를 다시 북돋아 주기 때문이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을 키우는 듯 선을 그어 줄기를 세우고 문장을 이어 덩굴 꽃을 피우 듯 나에게 편지쓴다. 무덤처럼 컴컴한 내면에서 때가 되면 밖으로 나와 세상에 알려지기를.





 


 

  

 

이전 17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너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