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드나드는 출입구 옆 화단에 낯익은 꽃이 보였다. 종지 나물이 피었던 자리에 돋아난 풀은 점점 키가 커지더니 종모양의 꽃이 딸랑거리며 피었다.
'초롱꽃이네!'
얼마나 반가운 친구인지 비가 내리는 줄도 모르고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안부를 물었다.
'내가 볼 줄 몰라 네가 자라는 줄도 몰랐구나!'
역시 친구는 연락 없이 찾아와야 더 반가운 법인가 보다. 지도를 들고 먼 곳만 다니다가 덜컥 코 앞에 있는 꽃을 보니 잊고 있던 기억이 같이 살아났다.
비오는날 초롱꽃@songyiflower인스타그램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은 달려가는 기차를 탄 것처럼 멈추지 못했다. 5년이 넘게 한 직장을 다녔지만 다른 곳에 새로운 인생이 또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았는지 금방 이직을 했다. 출근하기로 한 일정을 넉넉히 잡고 모처럼 쉬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내려 긴 휴가를 보내던 난문득 가족이 그리웠다.
도망치듯 벗어난 섬은 온 나라가 들썩이며 가고 싶은 곳 되었다. 비행기 운임도 저렴해지고 표 구하기도 쉬워졌지만 자주 가지 않았다.잠깐이라도 바닷바람이 맡고 싶었다. 막상이륙하는비행기 안에 있으니붕하고 들뜬 마음이 들었다.
공항에 내리자 익숙한 향내가 맡아졌다
고향집 정원엔여전히 남아있는 아빠의 화분들이 있었다. 주인은 없지만 난초와 다육식물, 텃밭작물들이 마당을 꽉 채우고 있었다. 정원에서 내 눈길을 끈 건 돌 틈에 잡초처럼 핀 초롱꽃과 덩이 나물 정도였다. 초롱꽃은 연한 보랏빛을 냈는데, 흰색과 진한 보라색이 잘 섞여 훨씬 고운 빛이었다. 옆에서 보면 종모양이고, 바닥에 엎드려 안을 들여다보면 작은 우산을 쓴 기분이었다.
진한 보라색 초롱꽃과 아래서 본 초롱꽃@songyiflower인스타그램
초롱꽃을 매일 보며 집밥도 먹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기대만큼 가족들은 반가워하지 않았다.
일정을 당겨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초롱꽃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고 온 걸 후회했다.
그리고 한참 뒤 막 돌을 지난 아이를 데리고 고향집을 찾았다. 호박잎 국과 성게 미역국이 참 먹고 싶었다.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난 아이의 기저귀만 바꿔주다가 서울로 왔다. 먹고 싶던 음식을 먹지 못했지만 더 아쉬운 건 따로 있었다. 예쁜 초롱꽃이 하나도 없었다. 개화가 늦어져 그런가 보다 싶어 정원을 다 뒤져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 보라색 초롱꽃들은 어디 갔어? 혹시 다 죽은 거야?
"무슨 꽃? 모르겠는데..."
"왜 종모양 꽃말이야. 내가 전에 예쁘다고 했던 거."
"아 그거? 난 그 꽃 싫더라 그래서 다 뽑아 버렸다."
또 몇 년이 흘렀고 칠순이 되신 엄마를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초롱꽃이 딸랑거리며 대문 앞에서 반겨주었다. 아이들은 종처럼 생긴 꽃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리고 엄마는 말했다.
'그거 다 뽑은 줄 알았는데 그 틈에 가지 하나가 나왔더라. 보기 싫은데 자꾸 보이네.'
초롱꽃이 예쁘다고 뽑지 말라고 몇 번을 부탁했지만 그 정원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내 마음을 한 번이라도 받아주길 바랐지만 늘 받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정원을 가진 분들 중엔 키우던 꽃이 갑자기 싫어질 때가 있다고 한다. 내가 아는 분은 매발톱꽃이 싫어져서 모두 뽑았는데, 해마다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피어난다고 했다. 그분은 매년봄마다 잡초처럼 뽑는다고 푸념을 하셨다.귀한 야생초였지만 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고 있었다. 고향집 초롱꽃처럼 말이다.
어쩌면 물건처럼 취급하기엔 식물들은 차원이 다른 존재인 듯하다. 갖고 싶을 땐 간절해서 아끼고 사랑하지만, 반대로 쉽게 죽어버리기도 한다. 또별생각 없이 데려온 화초가 떠나지 않고 견디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매발톱 꽃을 싫어하는 그분의 이야기가 잠시 위로가 되긴 했지만 나는 사랑받지 못하고 거절당한 어린 시절을 지울 수가 없다.
초롱꽃이 싫은 걸 나를 미워한다고 믿었다.
작년엔 엄마 정원엔 초롱꽃이 피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혹시 정원 주인의 눈에 띄면뿌리째 뽑아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는 고향집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 대신 집 앞 화단에 핀 초롱꽃을 보며 작년보다 더 탐스러워진 것 같아 뿌듯했다. 하얀색꽃도 있고 진한 보랏빛의 초롱꽃도 피었다. 지금 딱 보기 좋게 내 시선을 잡는다.
참 고맙게도 고향집에 피었던 연보라색 초롱꽃도똑같은 모습이다. 어린 시절을 도둑맞았다는 기분은 이제 멀어져 간다. 내 집 주변이 온통 꽃밭이고, 초롱꽃이 이맘때 나를 즐겁게 해 준다는 믿음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에 몰두하기보다는 지금에 더 무게를 두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담사가 말한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새로운 꽃이 피면 새로운 글을 쓰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쓰다 보면 예민한 펜은 날카롭게 상처를 내는 듯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잠깐 아슬아슬 송곳 같은 글들은 피하고 나니 또 긴 문장이 쓰여있었다. 배가 부른 듯했지만 포만감은 들지 않았다. 배를 채우려고 아무거나 먹는 음식처럼 글도 아무렇게나 쓰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머릿속엔 아무렇게나 피어난 야생화들이 보였다. 그 풍경이 상상이 되지 않는 날엔 집 밖으로 나갔다. 새로운 꽃을 찾으면아껴 놓은 듯 이야기가 술술 써질 것 같다. 봄이 되어도 초록 잎만 무성했던 화단에 꽃이 피었다. 종일 내린 큰비는 거리를 흠뻑 젖게 만들었다.
촉촉한 공기는 아침 산책을 재촉했다. 화단 한쪽에 쓰러진듯한 초롱꽃 묶음이 보였다. 누군가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꽃은 알고 있는 걸까?
빗물이 꽃송이를 무겁게 했지만 꽃은 아무렇지 않은 듯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얼굴을 묻고 비밀공간처럼 숨었다.
폭 감싸는 다정한 꽃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엄마는 보기 싫다며 다 뽑아 버렸는데, 섭섭할까 봐 내 앞에 찾아왔구나!
꽃이 있는 동안 나는 꽃의 자신감을 얻은 듯 용감해졌다. 하지만 금방 걱정이 되었다. 곧 떠나버릴 텐데 꽃이 나를 두고 가버리면 남겨둘 것이 필요했다. 초롱꽃 사진을 여러 번 찍었다. 그래야 훗날 그 존재가내 곁에 왔다 갔다는 걸인정할 수 있을 것같았다. 길가에 웃어주던 꽃은 한 주 만에 줄기만 남았다. 알고 있었지만 끝을 보는 건 섭섭했다.
삶을 되돌릴 수 없듯 꽃이 떠나는 것도 같았다.
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지만 떠나야 했다. 나도 모르게 꽃처럼 어디서든 피어나는 이야기를 찾고 있었나 보다. 꽃을 보던 나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줄 책을 고르러 도서관을 향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방금 떠난 줄 알았던 초롱꽃을 만났다. 똑같이 생긴 초롱꽃이 대문 앞 화단이 있는 집에 피어 있었다.
기회는 늘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매번 꽃이 알려준다. 아직 꽃봉오리가 남은 꽃은 도서관에 책을 반납할 때까지 날 기다려 줄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포근한 꽃의 그늘에서 사진을 조금더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