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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쌍 May 23. 2024

겁이 많은 너에게

금계국

동네를 빠져나가 중랑천 수변공원으로 향했다.  

매일 보는 풍경이 지루해질 때면 어김없이 중랑천의 야생을 만끽하러 나갔다. 인공적인 화단이 들어서고 조형물들이 하나둘 늘어나 요즘은 그마저도 사라지고 있지만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는 아무렇게나 핀 야생화가 있다. 게다가 물가에서 풍겨오는 수분기 섞인 바람은 자연의 청량감을 느끼기엔 너무도 충분하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야생의 목마름을 적셔줄 샘터였다.


봄꽃들이 왁자지껄하게 꽃잔치를 마치고, 잠잠해진 듯 고요한 정적이 좋았.  낮 태양은 정수리를 뜨겁게 하고 등 뒤에선 난로가 켜진 듯 따끈함이 느껴지니 잠시 휴양지에 온 듯 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얼마나 멀리 온 걸까?

걸어온 길을 뒤돌아 봤지만 내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내 앞도 그러했다.

자기 만의 방식이 있다는 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함께 어울려  지내야 하지만 사실은 누구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점이 아닐까. 세상에 하나 유일한 존재이니 죽음에 닿으면 점은 사라지고 구멍이 생길 것이다. 아니 그렇게 라도 존재 하고  싶었다.


이것저것 해보았다 싶었지만 온전히 몸을 맡겨 본 적은 없었다. 늘 한 발만 넣은 채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었다.

아직 찾지 못한 미래가 내가 가지 않은 시간 속에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삶에 아주 대단하고 획기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내 보금자리가 있다는 것에 안심했다. 특별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아도 나를 지켜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출근해야 할 곳이 있고, 나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글을 쓴다는 것이 풍요로움이었다.  


구멍을 하나 찾으려고 발버둥 치다가도 내가 이미 구멍을 차지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에 몸을 맡기면 비슷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 영혼은 자신감을 되찾다. 잠시 마을을 벗어나도 내면의 평화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나는 참 운이 좋은 편이다. 때로는 자연이 나의 종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야생이 풍기는 초록 기운을 맹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자연을 예찬하기보다는 진정으로 나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나 역시 때가 되면 한 줌의 부엽토가 될 테니까....




지난밤에 뜬 보름달을 보며
예쁘게 핀 꽃 한 송이 같았다.


검은색 삭이 되었다가 환한 만월이 되어 찾아온 달을 보며 잘 아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는 봄부터 여름이 좋다. 온기 속에서 무엇보다 충전된 듯 몸이 가볍고 활동하기에도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여름을 부르는 진한 노란색을 볼 때마다 열렬히 응원했다. 로 금계국이다. 더운 공기를 식히듯 바람이 한 껏 불어오고 흔들리는 꽃을 보며 아직 쓰지 못한 문장들을 불러오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한송이가 피어있지만 곧 진한 노란색은 반짝거리는 황금물결이 다. 코스모스가 피기 전에 피는 금계국은 얼핏 보면 진한 노란 꽃잎이  황화코스모스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훨씬 눈이 부시다.

 전에 살던 동네는 뒷산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포클레인이 산 허리를 휘집고 다니더니, 작은 공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맘때 경사진 언덕을 모두 금계국이 뒤덮었다. 주변에 키 작은 아까시나무 꽃이 향기로웠고 금계국은 바람에 자유롭게 머리카락을 날리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장미 덩굴이 손인사를 했지만 나는 노란 금계국 언덕을 가장 먼저 달려갔다.

 잠시 일렁이는 금계국 틈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발아래를 내려다봤더니, 대파 만한 굵기에 뱀 한 마리가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온몸이 굳어버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건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금계국이었고, 들리는 건 콧속으로 들락거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곳엔 나와 뱀 한 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신발 위로 올라오면 어쩌지 도망을 가야 하나?'


 어쩔 줄 몰랐다.

이미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버렸다.  

신발과 한 뼘도 안 되는 자리에 있던 뱀은 멈춘 듯했지만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지 못한 채 뱀에 물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은  바짝 마른 흙 위를 미끄러지며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뱀을 시야에서 계속 멀어졌다. 단단히 얼어버린 나는 뱀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잠시 뒤 한숨을 내쉬는데, 눈이 찔끔거리며 촉촉해졌다.




 방금 전까지 초록 덤불 사이로 눈이 부실 듯 노란 금계국을 보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금계국이 자유롭게 보였지만, 꽃도 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힘겨움도 있다는 걸 떨칠 수 없었다. 마치 옴짝달싹 못하는 내 처지처럼 느껴졌었다.


 갑자기 나타난 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내뱉는 숨은 바람 소리보다 더 거칠고, 태양만큼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쿵 뛰는 심장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살아 있음을 말이다.


뱀이 나를 찾아와 멈춘 시간은 생생히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나는 내 안에 내면의 셀 수 없는 풍요로움을 확인했다. 충만한 감정을 느끼는 방식이 맞는지 모르지만 분명 나는 방금 전 어마어마한 부를 축척한 사람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영화 미나리엔 미나리밭에서 놀던 아이와 순자 할머니가 뱀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래된 고목이 쓰러질 듯 드러누운 줄기에 올라앉은 뱀은 내가 만난 뱀 보다 훨씬 컸다. 놀란 아이를 차분하게 할머니가 진정시키 한 대사다.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낫다.
숨어있는 게 더 위험한 법이야.


 이 한마디는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아마 그 아이는 앞으로 뱀을 만나도 겁을 먹지 않을 것이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런 가족이 없었을까? 어른이 되어도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혼자 놀던 귤밭에서 뱀을 만난 어린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나 보다. 수없이 지나갔다 던 두려움이 뱀 같이 눈에 보는 것이었다면 나는 좀 나은 어른이 되었을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어린 나를 어쩌지 못했던 기억만 잡아 두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수없이 마주했던 공포들은 결국엔 겁만 주었을 뿐 나를 쓰러뜨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오히려  겁쟁이가 된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순자 할머니가 말한 숨어 있는 것들을 상상하며 두려워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뱀이 무섭다고 꽃구경을 안 할 것도 아니면서, 살아가는 일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잠깐 겁을 먹었던 나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의 할머니는 해녀였다.

나는 물이 특히 바다가 무섭다. 물가를 싫어하는 것도 물속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는 할머니를 기다렸던 마음 때문이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 마음이 남아 중랑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은 피하고 싶다.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최초의 기억이 있을 때부터니 5살 남짓이었을까?


" 외국으로 시집가라. 바다 건너 나가서 살아."


갇힌 섬에 살지 말고 외국에 나가서 외국 놈이랑 살아보라고 나를 부추겼다. 

틈만 나면 할머니는 때가 되면 나가라는 말을 하셨다.

할머니에게서 배운 것은 태어난 곳을 떠나 자유를 찾아도 된다는 것이 었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지혜는 나에게 전해졌고 또 나의 아이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물 건너 세상밖으로 나왔지만 나는 할머니의 허락이 없었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것이다. 워낙 겁이 많았으니 말이다.


 또 어떤 기억이 나를 울컥하게 할지 궁금해졌다. 금계국이 다 지기 전에 작은 여행을 나섰다.


  도시의 화단은 꽃나무와 땅 위에 야생화들이 뒤로 물러나자 담장의 찔레꽃이 다시 벌들을 끌어모으고, 벽에 기대선 장미 덩굴은 기다렸다는 듯 가장 화려한 꽃을 선보였다. 볼거리가 많았고 북적이던  축제는 끝났지만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봄과 여름 사이에 나도 어정쩡하게 서있는 듯하다. 향기를 풍기는 꽃들도 계절의 전환점이 왔음을 아는 듯했다.

도시의 야생화 지도는 이제 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야 할 때가 되었다.

다음 챕터로 넘기기 직전이다.  좀 더  뒷심을 발휘해서 사랑하는 봄을 떠나보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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