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세달살이 마지막 열흘의 기록들
그 꽃은 그 언제나 피어 있다
거리로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쪽 해자에 닿았다. 구름이 갓 빨래한 이불처럼 뽀얀 날, 물길 따라 걷다 보니 해자 가장자리에 빼곡하게 모여 둥지를 튼 연잎들이 보인다. 마침 꽃 피는 계절인지, 수면 위로 연꽃 봉오리 몇 개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불그스름한 빛깔을 보아하니 홍련인 듯하다. 오늘 해자에 연꽃이 핀 줄 알았으면, 좀 더 부지런히 출타를 서둘렀을 텐데. 정오를 이미 훌쩍 넘긴 시간, 꽃이 피어난 모습을 보기엔 이미 늦었다.
그 이름처럼, 연꽃은 연못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못은 고여 있는 물을 의미하니, 혹자는 연꽃을 두고 ‘더러운 흙탕물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연못도, 해자도, 콸콸콸 소리 내어 흐르지 않는다. 그 고요함을 닮은 어두운 녹색의 물은, 쉬이 그 속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어두운 흙탕물 위에 어느 날 불쑥 고고하게 피어나는 연꽃은, 그리하여 자신이 딛고 선 환경과는 정반대의 맑은 빛깔로 ‘속세에 물들지 않는 꽃’이라 불리며 칭송받기도 한다.
연꽃은 가장 무더운 여름 중에 개화하는데, 꽃봉오리를 맺고 나면 동틀 무렵부터 서서히 꽃잎을 열기 시작해, 사람들이 아침밥을 먹고 출근을 하느라 한창 분주할 즈음 가장 활짝 만개해 꿀벌과 나비 등 손님들을 맞이했다가, 태양이 중천에 오르기 전에 다시 꽃잎을 닫는다. 연꽃은 아마도, 여름의 뜨거운 온도는 좋아하지만 그 햇살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싫은가 보다.
자연의 크고 작은 모든 행위들은 결국 생존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되는데, 정오가 찾아오기 전에 서둘러 봉오리를 닫지 않으면, 연꽃은 타는 듯한 여름의 낮볕으로부터 암술과 수술을 제대로 보호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뜻한 볕이 마침내 피어날 온도를 마련해 주었다 해도,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여전히 연꽃 스스로의 몫.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은은한 향기를 피우며 포식자이자 조력자들에게 꽃가루를 나누어 주고서, 연꽃은 조용히 봉오리로 돌아가, 속이 보이지 않는 못의 고요함을 벗 삼아 수련하며 내일 다시 피어날 준비를 한다.
오직 일찍 길을 나선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꽃. 마침내 가장 알맞은 온도를 맞아 피어나면, 연꽃은 사나흘 간 태양이 뜨는 시간에 발맞추어 꽃잎을 활짝 열며 소임을 다한 뒤, 미련 없이 떨어진다. 짧디 짧은 연꽃의 생애 중, 피어나는 것은 개화라 하고, 지는 것은 낙화라 하는데, 비록 단 며칠뿐이지만 연꽃이 매일매일 뜨거운 햇살을 피해 부지런히 봉오리를 닫는 것은 특별히 일컫는 단어가 없는 것 같다.
인간이 그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지 못할 때에도, 그 역시 꽃의 일생을 바친 ‘피어남’의 일부이기에. 연꽃이 봉오리를 닫는 것을 따로 이름 붙여 부를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 무심코 다시 이 해자를 걸을 때엔 아마도 지고 없을 꽃. 생명은 짧지만, 이 땅의 그 모든 생명들은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해지는 법을 스스로 택했다고 한다. 연꽃의 수명은 단 며칠뿐인데, 스스로 선택한 생존의 법칙을 저버리고 요즈음 인간들은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중이다. 인간의 관점에선 연꽃의 죽음이 너무 일러 보이기도 하지만, 더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세대교체가 빨리 이루어질수록 생명체가 외부환경에 대응하는 속도도 빨라져, 결과적으로는 종 전체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이제 인공장기를 갈아 끼우며 한 세대가 거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 중이라는데, 반대로 지구의 환경은 최근 급속도로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기에 혹독해져 간다. ‘더 오래 살기’ 위한 지금 인간의 방법들은, 정말로 ‘더 오래 사는’ 방법일까? 한 세대가 오랜 기간 생존할수록, 종 전체는 빠르게 변화할 기회를 잃는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길어진 삶 동안 후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야 할까.
주어진 찰나를 불태우고 미련 없이 다음 생명의 불씨가 되는 식물들이 오늘 하루 벌이는 분투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지혜란 자연이 스스로 견고하게 설계한 그 모든 것들을 깨닫기엔 너무도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장 선명하게 무르익은, 빛의 과실들
2월 말부터 치앙마이는 서서히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한다는데, 다행히 아직은 날씨가 걷기에 좋다. 한층 뜨거워진 햇살에 바람마저 걸음을 멈춘 듯한 거리. 때때로 볕은, 투명한 적막이 되어 세상 모든 것들을 휘어 감는다. 고요함을 입은 한여름의 풍경들 속에서, 계절은 마침내 가장 선명한 색깔로 무르익는다.
오늘 초콜릿의 임무는
치앙마이에 갓 도착했을 때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었던 초콜릿상점에 오랜만에 다시 걸음했다.
뜨거운 여름에 걸맞게 화끈해 보이는 ‘핫스파이스멕시칸-멕시코 스타일의 매운 향신료가 든 초콜릿음료’을 주문했다.
초콜릿은 ‘달콤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엔 단맛이 전혀 없다. 우아한 향기를 지닌 카카오는 과거엔 다른 향신료들이 그랬듯 주로 제의를 치르는 데 쓰였는데, 그 시절엔 본래의 쌉싸름한 맛에 단맛이 아닌 매운맛을 추가해서 음용되었었다고 한다. 지금의 ‘초콜릿’은 카카오 특유의 씁쓸함을 우유와 설탕으로 누그러뜨리며 부드러운 ‘꿈’ 같은 맛으로 변신했지만, 수 천년 전 제사상 위에 올라갔던 초콜릿은 꿈결 같은 향기를 풍기면서도 막상 그 맛은 맵고 썼으니, 모르긴 해도 그 시절의 초콜릿은 아주 위엄 있는 음료였을 것 같다.
‘매운 초콜릿’을 제사에 썼던 아즈텍 제국은 이후 스페인에 정복당했고, 멕시코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는데, 고추를 기반으로 한 매운 멕시코음식들은 아즈텍 문명의 유산이기도 하다. 카카오빈을 고소하게 볶고 가루로 빻은 후에 고추, 계피, 넛맥, 옥수수전분 등을 넣고 끓이는 옛 아즈텍 스타일의 ‘핫초콜릿’ 역시도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매운 초콜릿’은 흔히 ‘멕시칸 초콜릿’이라고 불린다.
예전에 남미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블록형태로 된 ‘칠리초콜릿’을 선물해 주어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음료 형태로 된 ‘핫초콜릿’을 마셔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음료형태의 초콜릿을 뜻하는 ‘핫초콜릿’의 ‘Hot’에는 ‘뜨거운’이라는 뜻 외에 ‘매운’이라는 뜻도 있다-
계피와 팔각과 함께 끓여 나온 모습이 어쩐지 겨울음료인 ‘뱅쇼’가 떠오르기도 한다. 흔히들 불의 발견을 인류역사의 첫 번째 전환점으로 꼽는데, ‘향신료’의 발견 역시도 이후의 굵직한 전환점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인류의 식탁만 놓고 연대기를 쓰자면, 수렵하고 채집한 것들을 생으로 먹던 시절과 불에 익혀 먹던 시절, 그리고 익힌 음식에 각종 향신료를 뿌려 먹기 시작한 시절로 뚜렷하게 구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예전엔 제사 때나 귀히 음용하던 향신료를 단순히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 마시는 요즘은 인류의 ‘먹대기-먹연대기-’의 또 다른 시절이라 할 만한 것 같다. 이전의 아즈텍 사람들은 옥수수전분을 섞어 초콜릿을 걸쭉하게 만들었다는데, 이제는 그 역할을 우유–나는 오트밀크를 선택했다-가 하고 있다. 아마도 이전의 매운 초콜릿은 향신료의 개성이 보다 뚜렷하게 도드라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오늘의 매운 초콜릿은 부드러운 우유가 서로 다른 향신료들을 적절히 순화하고 서로 조화시키며, 특유의 맛과 향기들을 너그러이 품에 안았다.
이전 시대에 향신료들의 역할이 심각한 제의를 이끄는 것이었다면, 요즘의 향신료들은 아주 작은 한 모금이라도, 곰곰이 시간을 들여 음미하도록 작은 컵 속에 여유를 불어넣는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그 맛과 향이 이전보다 더 친근해진 만큼, 향신료들의 임무는 ‘신성하게’ 취급되던 그 시절보다도 더욱 막중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약한 존재들의 평온함
다시 길을 나서는데, 초콜릿상점 앞 의자에 고양이 한 마리가 떡하니 누워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얼마나 열심히 동네를 휘젓고 다녔는지 하얀 털이 꼬질꼬질하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뚱한 얼굴로 돌아보곤, 이내 다시 달콤한 오수에 빠져든다. 슬그머니 옆에 앉았더니 ‘넌 뭐냥!?’ 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낮의 불가항력에 이끌린 듯, 또 스르르 눈이 감겨 버린다.
낯선 사람이 바로 옆에 앉아도, 태평하게 한여름낮의 꿈을 꾸는 고양이. 동네고양이가 처음 보는 당신 옆에서 기꺼이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상냥함을 경험했다는 뜻.
다양한 생명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의 평온함은, 가장 강한 존재들의 온화함으로 만들어진다.
실컷 낮잠을 즐기곤, 고양이는 눈부신 오후의 빛 속으로 환영처럼 훌쩍 사라져 버렸다.
곧 해 질 녘, 꺼지기 전 마지막을 불태우는 빛을 등지고 터덜터덜 걸으니, 꼭 한여름낮의 꿈을 꾼 것만 같다. 몇 걸음 걷자마자 마주친 초록색 자동차가, 여전히 꿈결 속인 것처럼 신비한 빛깔을 뽐낸다.
저물 녘의 빛은, 손길이 닿는 그 모든 것들을 동화처럼 어루만져 놓는다.
너무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올드타운 동쪽거리에 야시장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야시장은 치앙마이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데, 올드타운 안에서 열리는 야시장은 처음 구경해 본다. 세달살이를 시작하기 전엔 지도에 야시장이 하도 많아서 ‘어차피 비슷한 상인들이 나와서 판매를 할 테니, 물건들도 다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도매로 물건을 떼 오는 상인들 말고도, 각자 마당이나 텃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이나, 직접 요리한 음식, 본업을 하면서 틈틈이 손으로 만든 공예품 따위를 소소하게 펼쳐 놓고 판매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야시장마다 오직 그 야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있다.
이 날은 ‘치앙마이를 떠날 때까지 아직 열흘도 더 남았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소유욕은 내려놓고 그저 가볍게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 돌아와 사진으로만 남은 물건들을 살펴보니 ‘이건 사 올 걸’ 싶어 뒤늦게 조금 아쉬워진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데다 가격도 합리적인 아기자기한 수공예품들이 넘쳐났음에도 불구하고, 치앙마이에선 고민 끝에 ‘굳이 이 물건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 날들이 많았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돌이킬 수도 없는 지난날의 내 선택들에 애꿎은 후회를 하다 보니, 삶에 물건들을 채워 넣고자 하는 욕망은, 물질적으로 정말 무언가 부족할 때보다 하루하루가 차분히 돌이켜 볼 틈도 없이 지나가 내 삶에 정말 무엇이 부족한 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을 때 더 타오른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치앙마이에서 꼭 사야 할 것들’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라탄인데, 휴양지 느낌 물씬 나는 가방과 모자, 부채 등부터 컵받침과 쟁반 따위의 작은 소품들과 제법 부피가 큰 의자와 탁자까지 합리적인 가격에 괜찮은 제품들이 넘쳐나는 데다가 라탄이라는 소재 특성상 무게도 가벼워서, 여행 전엔 세달살이의 마지막 숙소를 ‘라탄거리’ 근처로 일찌감치 정해 두고서 ‘마음에 드는 건 다 사 와야지!’하고 벼르기도 했었다.
야시장에도, 라탄거리에도, 눈에 들어오는 물건들은 많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은 오히려 없는 것과 같으니. 삶엔 매일매일 무수히 많은 기회들이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선택지가 많을수록, 그 많은 가능성들은 오히려 진정한 선택을 방해하곤 한다.
매일 여름의 빛이 환하게 물들인 거리를 걸으며 나만의 보물찾기를 하다 보니, 늘 아우성처럼 요란하던 욕망들이 어느새 저 먼 수평선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것도 같다. 걸음마다 기쁘게 시야를 밝혀 오는 무수히 많은 거리의 보석들은, 굳이 욕심 내어 내 주머니에 담는 것보다, 그 자리에 잠시 가만히 멈춰 서서 조용히 그 소리 없는 이야기들을 경청할 때에 더 아름답게 빛난다.
내일의 기쁨을 위해 비워 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야시장에서 딱 오늘 저녁 먹을거리만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복작이는 시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양손을 가득 채웠을 때에도 그 나름의 뿌듯함이 있지만, 지금 내게 정말 필요한 것들만을 손에 쥐었을 때의 홀가분함이란, 또 다른 깨끗함으로 마음을 채워 준다.
어묵국수와 코코넛푸딩, 레이스를 닮은 코코넛 쌀과자를 샀다. 어묵국수는 이미 치앙마이 곳곳에서 여러 번 맛본 음식이지만, 맑게 국물을 내고 어묵도 푸짐히 담아 준 야시장표 어묵국수엔, 누구네 집 부엌에서 만들어 온 듯한 친근함이 가득했다. 어쩐지 우리네 잔치국수가 떠오르기도.
타로를 삶아서 작게 깍둑 썰고 코코넛밀크를 부어 푸딩처럼 부드럽게 굳힌 디저트는 이번 치앙마이 여행에서 처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뒤 거침없이 ‘최애’ 자리를 차지한 녀석인데, 담백한 타로과육에 코코넛 특유의 살짝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폭신하게 입혀져서 금세 호로록호로록 먹어 치우게 된다.
코코넛밀크에 쌀가루를 넣고 반죽해서 아주 얇게 튀겨 낸 쌀과자는 주름치마처럼 독특하게 모양을 잡아서 와그작 와그작 씹는 재미가 있다. 야심한 밤 TV를 틀어 놓고 집어 먹기에 딱 좋은 간식거리!
오늘의 밤이 깊어 흘러간 뒤엔. 연꽃은 내일 다시 이른 아침을 맞이하며 꽃잎을 열고, 오늘과는 또 다른 물건들이 내일의 시장을 채울 터. 오늘 내 눈에 들어온 물건들과 끝내 연이 닿지 않았다 해도, 그 자리는 내일의 기쁨을 위해 비워 두면 된다.
그 작은 여유가 오늘 내 손에 들어온 기쁨들 또한 가장 크게 만끽할 수 있도록 기꺼이 공간을 내어 주어, 단 몇 가지의 소박한 음식들만으로도 마음을 구석구석까지 깨끗이 채워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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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편은 하루 늦게 발행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다시 연재일인 일요일에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