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두가 나름의 모습으로 아름답다

치앙마이 세 달의 기록들

by 여름햇살


새날의 기지개


치앙마이 세달살이의 마지막 숙소에 도착했다. 여태까지는 쭉 스튜디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원룸- 형태의 숙소에 묵었는데, 이번엔 침실이 분리되어 있는 원 베드룸 아파트먼트다.


스튜디오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모든 공간이 탁 트이게 눈에 들어오는데, 이 아파트는 현관 앞에 복도형태로 부엌이 마련되어 있고, 식탁을 경계로 해서 그 너머에 아늑한 소파와 TV가 있는 작은 거실이 있다. 소파 옆은 훤한 통유리로 되어 있어 굳이 TV를 틀지 않아도 소파에 걸터앉아 한적한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침실엔 발코니가 딸려 있는데, 새들이 침입하거나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가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바깥에 철망이 설치되어 있어 운치를 즐기기엔 애매하다. -대신에 빨래는 정말 실컷 널었다- 거의 평생 두꺼운 새시로 베란다를 막아 둔 한국형 아파트에서 살아왔기 때문인지, 남국에 오면 바람도 햇살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발코니가 참 좋다. 건조대에 대자로 몸을 누이고서, 햇살이 반짝이는 낮과 선선한 바람이 은은한 달빛을 실어 나르는 밤을 매일 직접 온몸에 들이쉴 수 있어서, 빨래들도 즐겁지 않았을까?


특이할 만한 점은 욕실엔 욕조와 샤워부스, 세면대만 널찍널찍하게 놓아두고 용변을 보는 화장실은 건식으로 따로 배치한 것인데, 약 2주간 사용해 보니 손님이 있을 때 특히 이용이 편리하고 관리하기에도 깔끔해서 좋았다.


게다가 처음으로 세탁기가 있는 숙소에 왔다! 12월에서 2월 사이의 치앙마이는 기온도 습도도 그리 높지 않아서 세탁을 그리 자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어쩌면 그건 숙소에 세탁기가 없으니 기준이 무디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외부의 코인세탁소를 이용해야 했던 여행 초반엔 2주에 겨우 한 번 하던 세탁을 빠이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1층에 공용코인세탁기가 여러 대 놓여 있는 콘도에 머물면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했고, 부엌에 한국원룸처럼 세탁기가 빌트인되어 있는 마지막 숙소에서는, 거의 2-3일에 한 번씩 세탁을 했다.


여행 전 숙박계획을 짤 때 ‘숙소는 다양한 곳을 두루 경험해 보자’고 결심하고 가장 저렴한 곳에서부터 계단식으로 조금씩 하룻밤 단가를 높여 가며 예약을 해 두었는데 –빠이는 제외- 옥상에 널찍한 수영장이 있는 고층콘도에 도착해 마지막 여장을 푸는 동안에 문득 세달살이의 첫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아담한 정원과 공용부엌이 있는 단층저택의 홈스테이 1인실이 떠올라, 새삼 두 달 반이 훌쩍 지나간 것이 실감이 났다.


모두가 나름의 모습으로 아름답다


‘저렴한 곳에서 점점 더 비싼 곳으로’ 라는 규칙을 정해 두었던 건, 사람은 한 번 좋은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이후론 그보다 덜한 것엔 쉽게 만족하기 어렵기 때문에, 혹여나 충분히 좋은 숙소인데도 단지 이전 숙소가 그보다 좋았기 때문에 불만족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했던 것인데, ‘당연히 비싼 숙소가 더 좋겠지!’라는 자본에 물든 생각과는 달리, 치앙마이에서 머문 다섯 개의 숙소 모두 –빠이까지 더하면 일곱 개- 각자 나름의 모습대로 아름다웠다.


첫 숙소는 욕실의 수압이 낮고 냉장고 주변에 개미가 있어 음식물은 전부 꽁꽁 묶어 봉인해 두어야 했지만, 첫밤부터 당당하게 ‘냥국심사’를 하겠다며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를 차지했던 노란 털의 고양이어린이가 작은 정원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길을 나서고 또 돌아오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어 홀로 낯선 나라에 뚝 떨어진 첫 일주일을 더없이 정겹게 보낼 수 있었다.


- 고양이어린이와 함께 아침을 맞은 하이야HaiYa에서의 하루는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19


올드타운의 두 번째 숙소는 밤이 되면 홀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조금 서늘할 정도로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5분만 걸어가면 떠들썩하게 불을 밝힌 동네시장이 있어 그곳에서 산 음식들로 따뜻하게 모닥불을 지피면 오히려 근사한 저녁식사를 만끽할 수 있었다. 2주간 쌓인 빨랫감들을 작은 배낭과 에코백에 바리바리 싸들고 코인세탁소를 찾아가던 길과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빈 가방을 메고 노을이 얼룩얼룩 물들인 동네를 유유자적 한 바퀴 돌았던 일도 왜인지 모르게 기억에 남았다.


-여름은 불 피우는 계절! 올드타운에서의 하루는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28


빠이의 숙소들은 두 군데 모두 열대곤충 특유의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바퀴벌레의 습격을 받았지만, 그마저도 자연의 당연한 섭리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방갈로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이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고양이들이 때마다 놀러 와 한참을 느긋하게 앉아 있곤 했던 테라스에서 내다보던 너른 논과 그 너머에 펼쳐진 늠름한 산의 정경과, 수풀요정들이 펼친 칠흑의 자락 속에 홀로 티비를 켜두고 낯선 태국어와 함께 흘려보냈던 밤의 정취는, 앞으로 그 어느 곳을 더 여행하더라도,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북슬북슬 동네친구들과 보낸 빠이의 하루는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41


싼티탐의 숙소에서는 건물 앞에서 종종 쥐떼를 보았지만 기다란 창 너머에서 그 언제나 먼 산의 줄기가 든든하게 반겨주었고, 이따금 출몰하는 작은 도마뱀들 덕분인지 벌레 문제는 겪지 않았다. 여행시작 전부터 사진 속 둥근 발코니에 마음을 빼앗겼던 창푸악의 콘도는 낡은 마루에서 끊임없이 부스러기들이 떨어졌지만 별렀던 대로 화분 가득한 발코니에서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며 자주 티타임을 즐겼고, 해가 진 뒤엔 도심을 수놓은 알록달록한 불빛을 관망하며 어느 쇼핑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시냇물처럼 밤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단골식당들과 보낸 창푸악의 하루는 여기로 https://brunch.co.kr/@summerstove/67


찬찬히 지나온 그 모든 보금자리들이 각자의 모습대로 아름다워,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도, 모두 나름의 모습으로 아름답기를, 다만 바랄 뿐.


갓 도착한 날의 풍경들


2월의 치앙마이는 여행을 시작했던 12월과 비교하면 서서히 기온이 오르고 있기는 하지만 수영을 하기엔 여전히 아직 서늘하다. 이 즈음부터 산간지역에서 화전민들이 산을 태우기 시작해 대기 중에 미세먼지가 많아진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아직 산책을 하기엔 무리가 없다.


벌써 세 달째 여행 중이지만, 새로운 숙소에 도착한 날은 늘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날처럼 설렌다. 노오란 양산을 집어 들고, 새로운 길로 나섰다. 이번 숙소는 규모가 제법 큰 탓인지, 종일 드나드는 차량이 많아 건물 앞이 혼잡하다. 하지만 큰길을 벗어나니, 금세 차원을 넘어온 듯 조용해진다. 마을 어귀에 멈춘 듯 고요히 흐르는 하천은 올드타운을 둘러싼 널찍한 해자와는 또 다른 품위가 있다. 아마도 그 기품은, 그 물이 그 자리에서 마르지 않고 흘러온 세월들로부터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사진에 조금 흐려 보일 때가 걷기 가장 좋은 때!


갓 도착한 날의 풍경들엔, 오로지 첫날에만 느낄 수 있는 낯선 기대감들이 가득하다. 차들이 북적북적 쉴 새 없이 오가는 도로변에 나 있는 사원의 입구엔 용의 비늘들이 파도처럼 물결친다. 그 위에 훌쩍 올라타면, 금세 부처가 인자한 얼굴로 다스리는 또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질 것처럼.


등에 올라타면 금세 저 너머에 도달할 것만 같은 푸른 용의 비늘들


무성한 가지 끝마다 붉은 꽃들이 셀 수도 없이 피어나 뒤덮은 어느 담장. 저 꽃나무는 대체 몇 년을 살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담장 뒤에 숨겨져 있을 세상이 궁금해지는


아마도 나무들 사이에선 동네 터줏대감으로 유명할 것 같은 붉은 꽃나무 바로 뒤편에 오늘의 목적지인 식당이 있다. 흙을 쌓은 것인지, 아니면 깎아낸 것인지, 투박한 모양의 담벼락과 머리 위를 무성하게 뒤덮은 나뭇가지 덕분에 어쩐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안에는 오늘 점심을 먹으려고 점찍어 둔 식당을 비롯 상점 서너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분명 도심 한복판인데 교외의 백숙집에 온 듯한 느낌


주문을 하려는데 카운터 바로 옆 냉장고에 콤부차가 여러 종류 진열되어 있어 한 병 주문해 보았다. 한 십 년 전부터 전세계의 발효음식들이 –우리의 김치를 포함해서!- 돌아가며 두루 ‘건강식’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최근엔 홍차나 허브차 등에 다양한 단맛을 가미해 새콤하게 발효시키는 ‘콤부차’가 새로이 그 인기에 탑승한 것 같다.



과일의 단맛을 가미해서 발효시킨 콤부차는 자주 보았는데 ‘강황맛Tumeric’은 처음이다. -강황은 카레에 들어가는 바로 그 노오란 향신료다- 마셔 보니 강황의 향은 미미할 정도로 은은하게만 감돌고 대신에 새콤한 맛과 톡 쏘는 탄산이 아주 진하다. 집에서 채소와 과일을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 두곤 며칠간 깜빡해서 냉장고 안에서 저절로 발효되어 버린 적이 있는데, 이때 생기는 탄산과 새콤한 맛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탄산음료와는 다르게 자연스러운 깊이가 있다. 이 날 마신 콤부차도 딱 그런 맛이었다.


새 모험을 시작한 첫날의 첫 끼니, 야외에 자리를 잡고 조금 풍성하게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주문한 음식은 해산물 팟타이와 케일해산물볶음. 메뉴판을 딱 보자마자 끌리는 것들을 고르고 나서 보니 둘 다 볶음요리에 재료도 대동소이해서 기다리는 동안 걱정이 좀 되었는데, 곧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 모두 식당의 풍경들을 닮은 정갈하고 산뜻한 맛이었다.




어쩐지 투명한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계곡식당에 온 듯한 느낌. 주변을 둘러보아도 물 흐르는 곳은 보이지 않고, 쏟아지는 건 한낮의 햇살뿐이다. 잠시 태양을 피해 쉬었다 가라며 머리 위에 작게 우산을 씌워 준 빨간 천막 덕분에 오늘 점심 한 끼가 더욱 생기를 얻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들리는 것만 같은


모두 오늘을 견디어 낸다


바로 옆에선 남국의 식물들이 따끈따끈한 태양빛에 화려한 색깔들을 더욱 또렷하게 벼리어 내는 중. 치앙마이의 잎사귀들은 꽃이나 열매만큼이나 그 색과 모양이 다양하다. 꽃과 열매는 씨앗을 퍼트려 줄 곤충이나 동물을 유혹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포식자들의 눈에 잘 띄는 색깔을 각각 취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빨간색 열매들은 자신들의 포식자인 조류들에게 빨간색으로 신호를 보내어 열매가 익었으니 와서 먹어도 좋다고 알리고, 이를 통해 빨간색을 잘 식별하지 못하는 다른 포식자들은 배척한다- 광합성을 하기 위해 초록색을 띠는 것이 보통인 잎사귀들이 이례적으로 분홍빛이나 붉은빛, 보랏빛을 띠는 것은, 실은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누군가 붓으로 그려 낸 듯한


이런 잎사귀들은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를 갖고 있는데, 자외선이 너무 높거나, 물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고온의 환경이 지속되거나 하는 등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 색소가 짙어지며 자외선을 흡수하여 잎사귀를 보호한다고 한다. 일 년 내내 고온건조한 환경이 지속되는 햇빛 찬란한 남국에서 식물들이 화려한 잎사귀를 뽐내는 건, 스트레스로 가득한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셈.


처음엔 그저 햇살의 축복처럼만 여겨졌던 그림 같은 빛깔들을 다시금 들여다보니, 화려한 색깔들이 덤덤하게 입을 모아 말한다.


‘나를 죽일 수 없는 시련은 나를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늘 같은 자리에서 햇살과 바람과 빗물을 그저 유유자적 주어진 그대로 즐기는 것만 같은 식물들도, 온 힘을 다하여 오늘 하루를 견디어 낸다.


갓 태어난 잎사귀들 속엔 좀 더 옅은 노란색도 있다 / 꼭 추파춥스 포장지 같은


곧 우기가 찾아올 것을 아는지, 화려한 빛깔로 또 하루를 이겨낸 보라색 잎사귀 사이사이에 작은 꽃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빗물에 휩쓸려 떨어지기 전에, 꽃은 살아남기 위하여 아름답게 자신을 물들인 잎사귀들 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할 것이다.


박쥐의 날개를 닮은 잎사귀들 틈새로 고개를 내민 꽃


비 내리는 계절이 찾아오면 이 화려한 잎사귀들도 그 빛깔을 잠시 내려놓을 텐데. 그때의 거리풍경이 못내 궁금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전에 치앙마이를 떠나야 한다. 세 달은 길지만, 또한 한없이 짧은 시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니, 아쉬움이 하나둘 생겨난다. 그 아쉬움들로부터,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대한 희망과 기대도, 풋풋하게 하나둘 싹을 틔운다.


구름 낀 날의 풍경들



밤의 물가에서


근처 하천으로 밤산책을 나섰다. 하천을 따라 죽 늘어선 노점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반가운 풍경을 만났다. 해가 지고도 아직 퇴근을 못한 집사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의리의 고양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집사는 연신 말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의젓하게 그 곁을 지키는 고양이의 샛노란 털 위를 미끄러지는 달빛을 좇아 밤은 두런두런 다정하게 깊어 간다.


집쨔야 저기 누가 우릴 쳐다 본다옹!


고양이는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이유로 ‘새침하고’ ‘개인적인’ 동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실은 무리 중에 새끼가 있으면 기꺼이 ‘공동육아’를 하고 ‘카피캣CopyCat’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개체의 행동이나 표정 등을 모방하는 데 기민하기도 한, ‘매우 사회적인 동물’이다. 고양이든 사람이든, ‘개인적’이거나 ‘독립적’인 모습들은 종종 ‘사회적이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받곤 하는데, 함께인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혼자서 적당히 자기만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성’이 아닐까.


우리 가게 오늘 영업 끝났댜옹! 대야 엎어 놓으면 영업 끝난 곤데!


까만 밤은, 야행성 동물인 고양이들의 세상! 종일 집사를 도와 열심히 노점을 지킨 고양이들이 퇴근을 준비하는 동안,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한 상점에선 집사를 따라 이제 막 출근한 고양이들이 추루를 사 올 손님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집쟈야, 메뉴에 추루맥주가 없댜옹! / 근데 혹시... 춘봉이랑 첨지 아니애옹?


멈춘 듯 고요한 물길을 따라 걸으니, 시간도 덩달아 어딘가로 흐른다. 이리도 많은 불빛들이 물가에 복작이며 모여 있는 까닭은, 잡아 둘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밤의 물결 위에 은은히 띄워 보내기 위함인가 보다.


이 밤을 흘러 흘러 그 끝에 닿을 어딘가


귀여움으로도 채울 수 없는 건


저녁을 먹으러 나갔던 밤산책에서 고양이들만 실컷 보고 왔다. 밤의 허기는 고양이들의 귀여움으로도 채울 수 없어! 숙소 주변 식당들을 검색해 보니 죄다 문을 닫았거나 아니면 문 닫기 일보직전. 치앙마이 세달살이 중 처음으로 배달 앱을 이용해 보았다. 오토바이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꼬치집이 새벽까지 영업 중이다. 맛있어 보이는 꼬치를 죄다 장바구니에 쓸어 담고 결제를 하고 나니, 배달이 밀려 약 40분 후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한바탕 씻고 나니, 음식이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와 있다. 아직 삼십 분밖에 안 지났는데! 도착하면 벨을 누르겠거니 하고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알쏭달쏭한 태국어 중에 용케 ‘Security’와 ‘Lobby’ 두 단어를 알아듣고 부랴부랴 1층으로 내려가 보니,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는 로비 구석의 길쭉한 탁자에 배달 온 야식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콘도 안전정책상 보통은 이곳에서 방문객 명부를 적고 배달음식을 놓아두고 가는 모양인데, 말이 영 안 통하는 외국인을 위해서 기사님은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직접 음식을 전달해 주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에 두근두근 커지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로 돌아와 묵직한 비닐봉지를 열어 보니, 따끈따끈한 꼬치 말고도 신선한 고수가 따로 왕창 들어 있다!


마침 숙소에 마련되어 있는 그릇이 오늘 처음 주문해 본 배달음식과 딱 어울린다. 예전엔 ‘배달음식을 다시 접시에 담아서 먹으면 설거지가 생기니까 배달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담으면,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고, 맛도 달라진다.


꼬치 열 다섯 개와 그릇이 서로 맞춤처럼 꼭 맞는다


까맣게 밤이 물들인 창가에 앉아, 치앙마이의 마지막 숙소에서 맞는 첫 번째 밤을 자축했다. 주문한 꼬치들은 가지, 오크라, 베이비콘, 새송이버섯, 열빙어와 어묵들. 편애하는 야채들은 두 개씩 주문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꼬치는 쫄깃한 쌀떡을 튀겨서 매콤하고 달달한 고추장양념을 바른 떡꼬치였는데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자주 사 먹었는데 성인이 된 후엔 사실 먹어 본 지가 오래되었다- 치앙마이에 와서 야채꼬치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가지는 말캉말캉하고, 오크라는 오독오독하고, 베이비콘은 서걱서걱하고, 새송이버섯은 쫄깃쫄깃해서 꼬치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즐기는 재미가 있는 데다, 이 식감들이 직화로 구우면 수분이 확 날아가 더욱 맛깔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매운맛 양념까지 화끈하게 발라 주면, ‘그래도 야채는 맛이 좀 심심하지 않아?’ 하는 편견도 시원하게 날아간다!


밑에 숨어 있던 열빙어와 어묵들


어디인지 모를 밤의 식당에서 훌쩍 날아온 꼬치들. 한입 해 보니, 역시나 기대한 바로 그 맛! 시원한 맥주 한 캔 곁들이면 끝내줄 텐데, 그 기쁨은 곧 새로운 숙소에 도착할 손님들과 함께 하기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대신에 꼬치들과 함께 깊은 밤을 날아온 싱싱한 고수를 곁들여 첫날밤을 푸릇푸릇한 설렘들로 싱그럽게 물들였다.



Copyright 2025 by 여름햇살 All Rights Reserved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