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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ㅅㅁㅅ Sep 28. 2017

달리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싫기도 하고요

처음 러닝을 시작한 건 2년 전이었다


신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기억나지 않는 어떤 계기로 집 앞을 달렸고 그때만큼은 날 괴롭히던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생각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단 게 정확하겠다. 주로 이불속에 서식하던 초식동물에겐 천지개벽할 힘듦이었다. 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고 입 밖으로 출처 불명의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만 마음속 응어리진 무언가는 성취감 반 스푼과 함께 약간이나마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날 이후 2년 동안 2,000km를 달렸다


매 달 100km씩 꾸준히 달렸고, 올해 4월에는 프랑스 파리까지 날아가 첫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러닝 크루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며 좁았던 나의 인간관계는 빠르게 확장되었다. 달리는 일상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러너들 사이에선 작은 인지도도 생겼다.

어느덧 러닝이 내 일상을 야금야금 잠식해가더니 지금은 꽤 거대한 조각이 되었다. 지금은 그 거대해진 비중만큼 달리는 일이 좋고 또 소중하다.



너 제일 싫어하는 게 달리기였잖아?

부모님 혹은 오랜 친구들은 러닝에 푹 빠졌다는 나의 고백에 한결같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맞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 가장 싫었던 것 중 하나가 달리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위를 못 견뎌하고 땀이 나는 모든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다. 게다가 안정과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필요 이상의 모험은 지양하는 성격이다. 이쯤 되면 러닝을 가장 좋아한다는 나의 말에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모두 알다시피 달리기는 더위와 땀을 발생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다. 또 스스로를 육체적, 정신적인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일이기도 하다. '원래 인간은 모순의 집합체 아니겠어?'라 합리화해보지만 내 성향을 생각하면 지금 달리기에 빠져 있는 게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달리기만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해체해보면 정말 싫어하는 요소를 하나씩은 품고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누군가에 맞출 필요 없이 나의 템포에 맞춰 일탈과 휴식을 오가는 경험을 사랑한다. 하지만 홀로 맞는 밤에 밀려오는 외로움과 공허함은 일시적이지만 극도로 우울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글 쓰는 것 역시 좋아한다. 글을 쓰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과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을 문장에 담는 건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내 글을 보는 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두렵고 싫다. 학창 시절, 교내 백일장에 당선되기라도 하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글이 교내 신문에 실려 모두가 읽게 될 거란 사실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계속 글을 쓴다. 필연적으로 누군가 보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쯤 되니 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그 모양(?)인 건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정신적 마조히스트'쯤 되는 취향을 가진건 아닌지 잠시 의심했지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닐 거라 믿는다.)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밤하늘이 어둡기에 달과 별이 도드라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싫어하는 요소들이 그 반대편에 있는 즐거움을 더 선명하고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원리 말이다. 


러닝이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것이었다면 이토록 좋아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마냥 평온한 것보단 가끔씩 벌어지는 다툼과 갈등이 친구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러닝과 나 사이의 관계도 좋고 싫음의 경계를 오가며 특별해진 게 아닐까 싶다. 


좋아하는 색깔 같은 단순 취향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면, 어쩌면 이런 모순이 필요조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집에서 이태원까지, 

30km 조금 넘는 거리를 달렸다.


이제 다음 주면 미국 포틀랜드로 이동해 두 번째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한다. 올해 파리에서 달렸던 기억을 돌이켜보면 이번에도 30km 지점 즈음부터 '내가 지금 여기서 대체 무슨 생고생을 하는 거지?'라고 자책하며 울분의 눈물을 쏟고 있을 것이다. 다리는 엉망진창이 되어 한 동안 걷는 것도 힘들어할 테고 아무리 자도 풀리지 않는 피곤이 며칠은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내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 거린다.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를 떠 올릴 때만 느껴지는 그런 설렘이다.


달리는 일을 정말 싫어하지만 

그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




Written by ㅅㅁㅅ 

(https://www.instagram.com/500daysinsummer/)

Photo by 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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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e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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