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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Oct 18. 2023

적당한 바람



   여름이 시작됨과 동시에 가슴 아픈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다른 중부 지역보단 강수량이 적었던 강원도지만, 끝없이 흐린 날이 이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날씨처럼 기분 한구석도 우중충. 습하고 더운 공기가 집 안 곳곳에 깔렸고, 어딘가 모르게 말수도 줄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외출을 해도 세상 모든 게 울고 있는 것 같아 얼른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샤워를 해도 쉽게 벗겨지지 않는 축축한 기분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집 안 구석에 숨어 있던 방구 부채를 찾아들었다.



   선풍기나 에어컨은 적당함이 없다. 선풍기는 1단과 2단 사이. 그 어디 즈음의 시원함이 없고, 에어컨은 미지근함을 모른 채 온도를 낮추는 데 급급하다. 영화 ‘노팅힐’을 틀어 놓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팔을 흔들며 부채로 바람을 만들면, 순도 100% 고농축 노동풍이 적당한 강도로 나에게 밀려온다. 선선함. 그 온도는 여전히 기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기분에도 적당함이라는 게 있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일상은 지루해진다. 지루함은 정체됨과 답답함을 만들고, 그 둘은 사이좋게 짝을 지어 ‘이대로 살아도 되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럴 때마다 외로움과 불안을 답안지에 빼곡히 써 내리고, 정답일 수 없는 그 답들은 장대비 같은 빗금으로 마음 곳곳을 할퀸다. 당연히 결과는 낙제. 그렇게 자존감은 떨어져서 과거를 복습하고, 복습하며 불행함을 재수강한다. 



   요즘이 딱 그렇다. 하는 일마다 엉망이고 계획했던 것들은 계속해서 뒤틀리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상한 소문까지 들어버렸으니 말해 뭐해. 그래서 집에 혼자 갇혀 기분전환을 위한 노력에 애쓰고 있었다. 주어진 것들, 그 속에서 소소하지만 새로운 기쁨을 찾아내고 만드는 일. 그런 점에서 방구 부채는 탁월하다. 직접 만드는 요리처럼 직접 만드는 바람의 맛은 화려하거나 간이 세지 않지만, 심심하면서 담백하다. 누구 입맛에 맞추려 노력할 필요 없이 오직, 내 입맛에 맞는 선선한 맛. 



   노팅힐이 끝날 때 즈음 잠이 들었다. 어떻게 노팅힐을 보면서 잠이 오냐 싶겠지만 족히 5번은 넘게 보는 중인 게 첫 번째 이유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부채 바람이 퍽 기분 좋았던 게 두 번째 이유다. 내가 원하는 세기와 온도로 직접 만든 하나의 바람 줄기는 미세하지만 묘한 성취감을 품고 있어서 그간의 외로움과 불안을 잠시나마 날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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