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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탈고 Oct 17. 2023

버거운 용서

  


   하조대 해변 구석에 숨겨진 숲숲카페에서 우리 셋은 마쉐이크 두 개와 쌍화차 하나를 시켜 놓고 하릴없이 허공을 보고 있었다. 물론 쌍화차는 나. 이곳 쌍화차로 말할 것 같으면 진하디진한 액체보다 씹는 맛이 제법인 견과류가 더 많은 별미 되시겠다. 홀짝홀짝. 아작아작. 정신없이 마시고 씹으며 하릴없이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마치 입으로 내뿜는 여름밤 하루살이 같은 내용들이 허공으로 퍼졌고, 그 가볍고 흐릿한 주제들이 가만있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요즘 내가 썸타는 사람이 있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가게 맛있더라, 이번 여름은 어느 해변이 파도가 잘 들어오겠던데 등등. 그런데 우디야 걔한테 왜 그랬어? 나? 그래 너. 네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던데? 내가? 응. 



   어쨌든 바다마을은 시골이다. 사람이 적어서 조금만 인맥을 건너 건너면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위 아 더 월드를 부를 수 있을 만큼 관계의 생태계가 좁다. 그런 곳일수록 소문은 일사천리로 배달되는 싱싱한 안줏거리다. 워낙 마르지 않아서 맥주보다 소주가 더 잘 어울리는 안주. 자기 잘못은 쏙 빼고 유리한 MSG만 왕창 뿌린 그 이야기는 감칠맛이 폭발하는 잡탕 같았다. 어찌나 얼큰하고 자극적인지 소주처럼 씁쓸한 감정이 마음으로 삼켜졌다. 와, 이 집 잘하네. 본인의 말실수로 내가 상처받았고, 그에 사과까지 했던 일은 언제 어디서 맛있게 까먹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럴수록 걔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취기처럼 올라와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상대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 있다. 원인은 미워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는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된다 고나 할까. 상대를 미워하면 할수록 내가 더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 따위의 감성적인 게 아니다. 정말 극도의 스트레스로 몸에 힘이 풀리고 무기력해진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우울증 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지랄병 같다고도 하지만 치료제는 간단하다. 그냥 용서하면 된다. 억울하고 화나는 감정을 꾸역꾸역 눌러가며 ‘그래 그럴 수 있지. 다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말을 곱씹으며 용서하면 신기하게 다시 회복된다. 



    감정이입을 잘해서 상대의 감정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상처 입는 방식은 간단하다. 자신이 상대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처럼 상대도 자신의 마음을 공감해줄 거라 생각하지만, 정작 아무도 내 마음을 신경 쓰지 않을 때. 나는 네 감정을 공감해서 심사숙고 대하는데, 너는 내 감정을 알지 못한 채 툭툭 아무렇게 대할 때. 그럴 때 느끼는 좌절과 거리감은 자신만이 떠안아야 하는 상처가 된다. 그런 사람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란 좀처럼 어렵다. 또다시 감정이입을 하고, 또다시 좌절과 거리감을 떠안을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미리 방어벽을 치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겉으론 차갑게 비치지만, 속으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마음을 나눈 사람이 너무나도 귀한 나는, 사람을 잃는 게 언제나 두렵다. 그래서, 그래서 용서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 사람이 떠날까 봐 함부로 미워할 수 없다. 



   여차저차 그런 이유로 걔를 용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얼큰한 소문을 들어 버렸다. 우리는 카페에서 일어나 하조대 기암절벽을 따라 이어진 짧은 산책로를 걷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걔 얼굴이 떠올랐다. 어떤 표정과 어떤 말투로 그런 말을 했을까. 내 귀에까지 들린 거면 꽤 다양한 귀를 거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직접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럼, 정말 나에게서 멀어질까 봐 무섭고, 무서웠다. 



   절벽 밑, 암석해안의 툭 튀어나온 바위 위로 파도가 밀려와 거대한 파열음과 하얀 물보라를 사방으로 튀겼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간, 묵묵히 파도를 견디는 저 바위도 결국 깎여 사라지겠지. 내 마음으로도 묵직한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왔다. 이렇게 계속 용서만 하다 보면 결국 나도 깎여 사라지지 않을까. 말 못 하는 저 바위처럼 고요하게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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