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탈고 Oct 21. 2023

바다 손님들



   짙은 푸른색 외투로 갈아입는 겨울 하늘은 포인트가 될 만한 구름 한 점 걸치지 않는다. 바지는 그보다 더 짙은 푸른색의 바다. 모자는 파스텔톤 주황색과 노란색을 오묘하게 섞어 놓은 햇빛. 촌스러운 청청 패션이지만 그런 고집스러운 취향이 워낙 사랑스러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기가 많다. 하지만 겨울 바다는 단골들을 위해서만 문을 열고, 짧은 여름 시즌 동안에만 남녀노소 모두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여름 휴가철만 되면 오픈런으로 바다를 사려고 사람들은 모여든다.



    여름 바다는 마치 인간의 소모품 같다. 해변 가득 꽂힌 색색 파라솔과 그 밑에서 휴가를 만끽하는 사람들. 치킨과 맥주로 배와 기분을 채우고, 폭죽을 터트려 영원히 빛날 추억을 검은 밤하늘에 수놓는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면 연극이 끝난 무대처럼 화려함이 걷어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제야 단골들이 하나둘 찾아와 내려앉는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바다는 원래 free다. 갈매기들은 그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단골이라 할 만하다. 



   남애1리 바다엔 유난히 많은 갈매기 떼가 무리 지어 있다. 몇십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녀석들은 해변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일제히 날아올라 반대편 어딘가로 옮겨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에 마법이 걸린다. 시선 모퉁이까지 푸른색으로 꽉꽉 들어찬 풍경 위로 하얀 날갯짓이 혜성처럼 지나가면, 작은 소원은 가볍게 이루어질 것처럼 마음이 들떠 버리니까.



   다른 해변도 마찬가지지만 갈매기 수는 삐뚤빼뚤이다. 여름 동안 많은 사람이 다녀간 해변일수록 갈매기는 찾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 전, 동산해변을 걷다 웬 갈매기 한 마리가 덩그러니 서서 부리로 모래를 쪼고 있었다. 뭘 하나 했더니 치킨 뼛조각을 삼키려 부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거였다. 바로 그 옆엔 맥주 뚜껑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엔 터트리고 그대로 버려둔 폭죽 잔해가 있었다. 놀란 마음에 후다닥 달려가 갈매기를 쫓았지만, 저 먼 곳에서 다른 갈매기가 모래에 부리를 파묻고 있더라. 부디 아니기를.



   담을 봉투가 없어 인간의 몇 없는 자랑거리 중 하나인 열 손가락을 최대한 활용해 주울 수 있는 만큼 쓰레기를 주웠다. 도시에 살 땐 남이 버린 쓰레기를 줍는 건 특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유별난 선행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 일이 비치클린이다. 



   바다란 관광지이기 이전에 우리가 잠시 임대하는 터전이다. 그런 곳이 더러우니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짜증 나고 화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건물 오픈 46억 주년 파티에 수만 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신나게 먹고, 마시고, 토하고, 춤까지 추다가 그대로 떠나버린 현장을 남겨진 몇몇 사람들이 정리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파티 주체자이자 건물주는 지구. 정작 초대장은 갈매기와 철새, 해양 생물 등의 VIP 손님들에게만 줬는데. 이곳, 해변마을에 남겨진 몇몇 사람들은 본인들도 초대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최소한의 예의를 가지고 비치클린을 하는 것이다. 



   열 손가락 가득 꽂아온 쓰레기를 트렁크에 싣고 집 앞 분리수거장에 버리다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싸질러 놓은 똥보다, 갈매기가 싸지르는 똥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 다가오는 이번 여름부턴 조금이라도 괜찮아지길 빌어본다. 그래서 모든 계절에 모든 갈매기가 쉬엄쉬엄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이전 21화 적당한 바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