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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노란 May 26. 2024

나는 팔자 좋은 여자입니다

직장을 다닐 적에, 같이 일하던 동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는 왜 일해요?
내가 언니 였으면 나는 일 안 할 거 같은데.


최근에는 이런 말도 들었다.

너는 참 팔자가 좋아.


나는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가격표를 보지 않는다. 가격이 아니라 유기농, 동물복지, 국산 같은 가치가 우선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왔는데 친정 엄마가 얼마냐고 물어보면 대개 '몰라'라고 답한다. 친정 엄마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돈 많아서 좋겠다고 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할 때 돈을 가장 먼저 얘기한다. 동네 아줌마들은 나를 돈 잘 버는 남편을 둔 아줌마라 생각한다. 남편 회사 주식이 많이 올랐을 때 남편 회사 동료들과 지인들, 내 친구들과 가족들은 우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맞다. 남편 잘 만나 팔자 핀 여자, 그게 나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돈은 중요하다. 돈이 없을 때는 지금처럼 깨끗하고 예쁜 내 집에서 살 수 없었다. 돈이 없을 때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을 수 없었고 새하얀 식탁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기쁨을 누릴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 2년 뒤의 이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고, 으슥한 골목길을 걷다가 피흘리며 쓰러진 남자를 발견하고 무서워서 발걸음을 서두르는 일도 없다. 손목이나 허리의 통증으로 누워 있을 일도 없고, 돈으로 귀찮은 집안일을 위임해 버리고 좋아하는 책을 읽을 시간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돈은 사라졌다. 앞선 글에서 적었듯 완전한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통장에 꽂혀 있던 10억은 사라졌다. 생각보다 많은 예산이 필요했던 인테리어 공사는 빚을 남겼고, PT는 끝났으며, 집안일 해줄 사람도 더는 부르지 않는다. 30만원이었던 세무처리 비용이 100만원까지 치솟았고, 곧 종소세 신고가 끝나는데도 아직 정확한 세금 액수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돈이 사라졌다고해서 활짝 피어났던 나의 팔자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집은 여전히 깨끗하고, 나는 혼자서 운동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집안일은 여전히 번거롭지만 대신 누군가 집에 오는 불편함은 없어졌다. 돈을 주고 집안일 해주는 사람을 불러 책 읽는 시간을 샀던 나는 혼자 설거지하고 빨래를 개는 동안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주식이 크게 올라 10억이 생겼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돈을 증여해준 남편이 여전히 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몇억, 몇십억, 수백억이 있고 그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당연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굳이 그 돈이 없더라도 행복은 어디서든 얼마든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꼭 수십억이 생겨야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PT를 결제하고 집안일 해줄 사람을 부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10억을 품에 안았다가 놓아주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돈이 아까워 먹고 싶은 음식을 참고 참다가 서러워질 때서야 겨우 구해다 먹던 나는 이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구해다 먹는 법을 배웠다. 돈을 지불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줄 즐거움, 건강, 지구 같은 것들을 말이다. 아직 멀다고 생각했던 노후의 삶과 그에 필요한 돈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웃기는 얘기지만 혹시나 다음에 다시 큰 돈이 생기면 덜 불안해할 자신도 생겼다. 하하.




네이트 판에 내가 겪은 얘기를 올렸다가 소설 쓰냐는 비아냥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댓글도 달렸다. '웃기지 마라. 돈 잘 벌고 마누라한테 잘 하는 남자가 있다고? 있어도 너랑 살 리가 없다.' 거기에 달렸던 대댓글이 인상적이었다. '돈 잘 벌고 마누라한테 잘 하는 남자가 인터넷에 이런 댓글 다는 너랑 안 사는 건 분명함.' 재미있는 글이었다.


사람들은 팔자 좋은 나를 부러워한다. 저 여자는 남편만큼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편하게 돈 벌어오라고 살림을 꼼꼼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남들에게 나는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 살면서 좋아하는 글을 써서 용돈이나 버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나도 가끔 이런 내 팔자가 놀라울 때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네이트 판의 댓글을 생각한다. 내가 남편의 수입과 상관 없이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고, 호기롭게 사치를 장담하고 외출해서는 환아들의 기부를 위한 키링 하나를 달랑 사들고 오는 사람이기에 남편이 기꺼이 나를 사랑하고 10억을 주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냐고. 돈이나 기능적인 쓸모로 따지면 나는 분명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글이나 사실 관계로는 전달되지 않는 나의 성실함이나 다정함, 유쾌함과 같은 덕목들이 남편에게 꽤 큰 가치를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게 왜 나를 이렇게 좋아하냐고 물으면 예뻐서라고 대답할 테지만.


내 팔자는 내 것이다. 남편을 잘 만나 거저 얻은 팔자처럼 보일 테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남편은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은 살면서 여자가 대놓고 만나자고 들이대는 경험을 처음 해봤다고 했다. 남편이 처음 대기업으로 이직한 건 결혼을 했으니 안정적인 직장을 다녀야 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대기업을 때려치고 작은 회사로 이직할 때 그의 결정을 지지해 준 나에게 고맙다고도 했었다. 내 팔자를 남편이 만들어 주었듯 남편의 팔자 역시 내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닐까?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지만 역시 기왕이면 해몽이 좋은 쪽이 더 마음에 든다.




인생이란 것이 늘 그렇듯 내일의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토록 궁상 맞게 살던 우리 부부에게 그 큰 돈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이토록 금방, 꿈결처럼 돈이 사라질 줄은 또 누가 알았겠나. 돈이 많든 적든 삶은 계속 된다. 내가 할 일은 그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을 즐겁고 열심히 사는 것 뿐이다.


내가 글을 써서 버는 돈은 남편 월급의 1/10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언젠가 괜찮은 글을 써서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나는 매주 로또도 산다. 미리미리 해뒀어야 한다고 아쉬워하면서 이제라도 부동산과 주식을 좀 더 열심히 공부한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 준비한 작품도 겨우 아르바이트 시급을 모면하는 정도의 돈을 안겨줄 것이다. 매번 그랬듯 로또 역시 모든 번호가 빗나가며 장렬한 꽝을 맞이할 것이다. 길치인 나는 우리 동네 아파트 브랜드 외우기도 벅차고 임장은 두려우며 주식은 마이너스를 면치 못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헤매다가 한 번은 좋은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10억처럼 큰 돈일 수도, 5만원처럼 작은 돈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삶은 분명 나보기에 좋은 것을 한 번은 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너무 당황하지 않고 그 선물을 감사히 받을 것이다.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말이다.




<어느 날, 10억이 생겼다>는 오늘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돈 얘기로 시작한 글인데 주가가 떨어지고 내야 할 세금이 한 트럭이 되는 바람에 더는 쓸 얘기가 없어졌네요. 돈을 잘 굴려서 100억 부자가 되었다거나 작업실 구하는 얘기, 난생처음 백화점에서 가방 사보는 얘기 같은 걸 썼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다시 한번, 귀한 시간을 내어 저희 집에 벌어졌던 깜짝 사건 이야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적어주신 댓글과 눌러주신 하트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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