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에 불안을 넣으면 용량 초과입니다만

불안과 함께 여행하고 싶진 않습니다

by 김승

'여행 좋아하는데 학생 때랑 이직 준비할 때는 왜 안 갔어?'


그동안의 여행에 대해 말하면 받는 질문이다. 대학생 때 방학을 활용하거나 이직 준비를 하면서 여행을 가는 이들이 많다. 비슷한 상황에서 나의 선택은 여행이 아니었다. 첫 여행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여행은 회사에 소속된 채 휴가로 다녀왔다.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상태일 때만 '여행'이라는 선택지가 생기는 걸까. 돌아갈 노동의 자리가 있을 때만 여행을 택했다.


20160926_172406.jpg 첫 유럽여행이었던 프랑스 파리의 퐁비두 센터. 처음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했다.


대학생이 되면 당연히 배낭여행을 가는 줄 알았다. 결국 자퇴로 끝난 첫 번째 대학생활은 내내 심적으로 불안했다. 수능을 다시 보고 들어온 대학에서는 돈이 생겨도 생활비로 쓰거나 학자금 대출 이자를 갚는 게 우선이었다. 취업준비를 해보겠다고 휴학을 한 해에도 공모전과 대외활동이 우선이라 여행은 생각조차 못했다. 여행의 뜻이 '낭만'이라고 믿었고, 자금과 마음의 여유 없이 그것을 누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생애 첫 퇴사 후에는 마음이 만들 수 있는 최대치의 불안을 몸으로 느꼈다. 지난 회사생활을 곱씹고, 새로운 이력서를 쓰는 시간에도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장점보단 단점, 기쁨보단 분노가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변에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말해도, 불안이 피부 사이사이에 박혀있어서 여행의 설렘을 삼켜버릴 게 뻔했다. 당장 짐을 챙기라고 해도 캐리어에 무엇을 넣을지보다 내 안에 있는 불안을 어떻게 뺄지부터 고민해야 할 테니까.


20160926_115812.jpg 프랑스 파리 몽마르뜨 언덕. 소매치기에 대한 불안만으로도 긴장되었는데 소지품으로 불안을 챙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정의한 '여행'에는 손톱만큼의 불안도 없어야 한다. 없는 걱정도 사서 하는 내게 불안을 짊어지고 가는 여행은 고행이 될 게 뻔하다. 비행기 티켓을 사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캐리어에 불안을 넣는다면 수화물 용량을 초과하지 않을 자신 있냐고. 비행기 티켓을 일찍 사면 저렴하겠지만 몇 달 뒤 내가 가질 불안을 짐작하기 쉽지 않아서 망설인다.


다음에 퇴사하면 그때는 여행할 수 있을까. 지금도 입버릇처럼 나중에 회사 그만두면 몇 달 여행을 가겠다고 말한다. 그때쯤 높은 자존감과 마음의 안정이 생겼기를 바라며 주문처럼 하는 말이다. 어쩌면 어디에 소속되지 않은 채 여행을 다니는 게 판타지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불안을 넣고 그게 얼마나 커지는지 지켜보는 여정이 되지 않을까.


20160925_153244.jpg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 불안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면 물방울 하나하나가 다 걱정으로 보였을 거다.


내게 여행은 '해결'이 아니라 '유예'다. 내 삶에 대한 거대한 질문에 대해 힌트를 줄 순 있지만 답을 주진 않는다.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가 여행지에서 해결될까? 모든 걸 잊고 즐기고 돌아와서 마주하거나 내내 걱정에 시달리다가 오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오히려 여행이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게 불안을 더 심화시키지 않을까. 해결될 거였다면 애초에 여행지에 들고 오지도 않았을 거다. 불안을 유예하는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겪고 싶지 않다.


요즘 잘 지내냐는 안부에 여행 중이라고 답하거나 여행 계획에 대해 말한다면 잘 지낸다는 말이다. 부디 앞으로도 여행을 꿈꿀 수 있기를 바라며 출근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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