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모국어음악을 생명수처럼 마시는 순간
외국여행 때마다 열흘 정도 다녀온 듯 한데, 일정의 절반 정도만 지나도 모국어가 그리워진다. 한국인이 그립다는 뜻은 아니다. 올해 2월에 갔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어딜 가도 한국인이 너무 많아서 여행의 낯선 설렘이 거의 없었다.
그리움의 정확한 대상은 모국어음악 속 가사다. 낯선 땅에서 모국어음악을 들을 때 느껴지는 포근함이 좋다. 자기 전에 듣는 모국어음악은 이불보다 더 큰 따뜻함을 준다.
여행 며칠 전에 음악을 고르고 있으면 마치 무인도에 가져갈 음악을 고르는 느낌이다.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여행 마지막날 잠들기 전까지 곱씹을 말들이기에 좋아하는 가사의 곡을 고른다. 그렇게 준비한 몇십 곡들이 여행 전에 챙길 가장 중요한 준비물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많이 듣는 곡들이 있다.
백예린 - love you on christmas
크리스마스가 되면 frank sinatra의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와 cee lo green의 'the christmas song'을 제일 먼저 찾는다. 하지만 모국어가 그리운 여행지에서는 백예린의 'love you on christmas'를 듣는다.
작년 9월에 갔던 스페인은 유난히 더웠다. 특히 세비야는 몇 분만 걸어도 발자국수만큼 땀줄기가 생겼다. 거리에서 군밤을 파는 아저씨는 이상기온 때문에 더워서 장사가 안 된다며 하소연한다. 햇살이 여행자인 내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달갑진 않을 듯하다.
스페인광장에서 땀이 옷을 거의 다 적실 때까지 돌아다닌 뒤에 호스텔로 돌아온다. 샤워를 하고 2층 침대에 올라가서 백예린의 노래를 듣는다. 크리스마스 풍경만 상상해도 제법 선선해진다. 군밤 아저씨도 이 곡을 들으면 화가 좀 누그러들까.
특별한 날이라서 행복한 게 아냐
그저 그대와 함께라서
한국보다 더운 도시에 와서 크리스마스 노래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꽤나 특별한 일이다.
이소라 - 너에게
이소라의 '너에게'는 들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곡이다. 곡은 변하지 않고 내가 변하느라 시기에 따라 이 곡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
너라는 큰 힘이 내게 있어
오 그래 너는 나의 조금 간절한 인사야
마음에 이 가사가 닿을 때, 내 기분에 따라 슬프기도, 기쁘기도, 부럽다. '너'라는 단어가 때로는 타인이 되고 때로는 내가 된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위로의 말이 되기도 하고, 서러움을 터뜨려주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일을 겪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이 곡을 듣는다. 가사 속 '너'를 '여행'으로 치환하는 나를 발견한다.
박새별 - 그대는 아는지
여행지에서 회상을 시작하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다. 기억나지 않던 부분까지 상세히 기억나고, 잊고 싶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걷다가 창피한 기억이 떠올라서 혼자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추억을 쌓으려고 시작한 여행인데, 잊었던 추억을 회수하는 여행이 된다.
사실 말야 흘러가는 계절 너머로
울고 웃던 너와 나 그 많은 시간 속에 나의
바램과 기대와 눈물이 함께 서려 있어
그대는 아는지
내가 걷는 여행지는 수많은 이들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있다. 사진을 찍다 보면 한 프레임 안에 활짝 웃는 사람부터 우는 사람까지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다. 도시는 그걸 알고 있을까.
누군가 나와 함께한 추억을 기억 못 하면 감출 수 없이 섭섭한데, 때로는 타인과 함께한 추억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잊어버린다. 여행 도중에 잊었던 추억을 발견하고 누군가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일이 늘어난다. 추억을 되찾는 여행은 어떤 면에서는 사죄의 길을 걷는 것만 같다.
손성제 - 멀리서
쉴 틈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내게 여행은 일상과 비슷하다. 즐거움은 찰나이고 힘들고 벅찬 순간들이 꽤 많다.
나조차 내 맘을 미워하게
나 같은 바보를 경멸하게 하는
몹시도 오래 묵은 걱정
김지혜가 부르고, 이적이 가사를 쓴 손성제의 '멀리서'는 끝까지 따라 부르기 힘들 만큼 슬픈 곡이다. 간주에 나오는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소리는 슬픔을 꾹 참고 담담하게 부르는 곡과 대비를 이룬다. 마치 여행지의 주요관광지에서 수많은 인파 사이로 이방인의 서러움을 느낄 때처럼.
여행지에서 다양한 이유로 무너지곤 한다. 다양한 사유가 있지만 주로 사람 때문이다. 그럴 때면 이 곡을 들으면서 아예 감정의 바닥을 친다. 실컷 울고 털어낸 뒤에 다시 일어난다. 무너진 마음 다음에 택할 선택지는 일어나는 것뿐이다. 돌아갈 곳이 있는 여행자기에 일어나서 다시 걷는다. 슬픔이 멀어질 때까지.
이예린 - 찰나
영원을 믿지 않는다. 찰나와 순간을 믿는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여행지에서 이예린의 '찰나'와 '순간' 두 곡으로 하루를 마무리한 날이 많다. 피아노 반주와 목소리만으로 진행되는 곡이라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하루 중 좋았던 찰나가 소중해지고, 힘들었던 순간을 날려 보내게 된다.
너의 세상에 감히 들어가도 될까
힘껏 너를 안고 입 맞춰도 될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 찰나의 시간이 소중하다
너의 하늘에 잠시 머물러도 될까
그 품에 가득히 숨 쉬어도 될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 찰나의 고요는 영원하리
아, 소중하다
잠에 들지 않아도 꿈을 꿀 거야
별빛 한 줌 없이도 눈부실 거야
너의 새벽이 오면 속삭여도 될까
넘실대는 마음 노래해도 될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이 찰나의 입술은 꽃 피우리
아, 소중하다, 소중하다
순간의 기억들은 따뜻할거야
자꾸만 비워내도 채워질거야
잠에 들지 않아도 꿈을 꿀 거야
별빛 한 줌 없이도 눈부실 거야
소마 - 꽃가루
9월에 독일에 갈 때는 이 노래를 들고 갈 거다.
봄은 짧으니까
노래 속 가사처럼 봄은 짧고 낯설다. 여행은 봄을 닮았다. 한 해 중 아주 짧게 존재하고 익숙해질 때쯤 떠난다.
허밍이 매력적인 곡이라, 허밍 위에 내 이야기를 쓴다. 지금은 미지의 세계인 독일에서의 여행이 끝나고 서울에서 이 곡을 듣는 모습을 상상한다. 지금은 그냥 허밍으로 들리지만, 그때가 되면 레몬즙으로 쓴 글씨처럼 허밍 위로 추억이 서서히 드러나지 않을까.
옥토버페스트의 맥주보다 소마의 '꽃가루'를 낯선 땅에서 듣는 순간이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