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익숙해질수록 스스로에게 가혹해진다

기차를 놓치고 자책하다

by 김승

아씨시는 로마 위쪽에 위치한 도시다. 2월의 아씨시는 푸르다. 아씨시의 주요 관광지인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과 로카 마조레 앞에서도 그 주변을 둘러싼 하늘과 들판이 더 인상적이었다. 각각 스포이드로 찍어서 종이 위에 떨어뜨리면 맑은 푸른색과 녹색이 나올 것 같다. '아씨시 블루'와 '아씨시 그린'이라고 부르면 될까.


보기만 해도 마음 편해지는 도시라서 그런지 오후에 숙소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밤이었고 렌즈를 낀 채 잠들어서 눈이 뻑뻑했다. 자느라 야경을 못 본 걸 자책하다가 여행 중 휴식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합리화한다. 내일은 피렌체로 이동한다. 한국에서 예약한 기차표를 확인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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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과 푸른 들판 덕분에 더 인상적이었던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과 로카 마조레


다음날 눈 뜨자마자 빠르게 씻고, 옷을 입고, 짐을 정리하며 떠날 준비를 한다. 조식을 먹으러 라운지에 나가보니 뷔페다. 빵과 요구르트를 종류별로 먹는다. 아직 기차출발까지는 시간이 남는다. 라운지에 모인 다른 이들이 먹은 것을 합친 만큼 먹고 나서 조식을 마무리한다.


체크아웃하고 캐리어를 끌고 돌길 위를 걷는다. 어제 봤던 풍경들을 스쳐지나 걷다 보니 어느새 버스정류장이다. 구글맵으로 보니 버스도착까지 10분 정도 남았다. 정류장이 종착지라 버스들이 머물다 가는 시간이 길다.


KakaoTalk_20180323_001314007.jpg 아씨시에서 묵었던 숙소의 다락방


방금 정류장 뒤쪽으로 들어온 버스는 이곳이 종점인 듯하다. 시동을 끈 버스기사는 내려서 화단에 걸터앉아서 빵과 우유를 먹는다. 빵에서 흘러나와 입에 묻은 크림이 아씨시의 구름색을 닮았다. 식사가 끝난 버스기사는 아무도 타지 않은 버스에 타서 어디론가 출발한다.


아까 간 버스 이후로 정류장에 들어오는 버스가 없다. 구글맵에는 버스가 이미 지나갔다고 뜬다. 내 앞에 멈춘 버스는 없었기에 잘못 뜬 거라고 믿는다. 버스 간 배차간격이 커서 이번 버스를 못 타면 기차를 놓친다. 잘만 연착하던 기차는 연착 소식이 없다. 급하게 우버와 마이택시를 설치한다. 신용카드 번호를 입력하고 가입을 끝내도 둘 다 지원 지역이 아니라고 뜬다. 내가 아까 보낸, 빵 먹던 버스기사의 버스를 탔어야 함을 뒤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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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는 발 닿는 곳마다 아름다웠는데, 애석하게도 가장 선명한 기억은 기차를 놓쳤던 순간이다


기차는 이제 명백하게 놓쳤다. 기차비는 몇 만 원을 날렸다. 새로운 표를 사야 하니 돈을 더 써야 한다. 다음 기차까지는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피렌체 두오모 입장 시간을 저녁으로 잡아서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빡빡하게 움직여야 한다. 날린 시간과 돈, 여유에 대해 곱씹는다.


자책타임의 시작이다. 왜 아까 그 버스가 나의 버스일거란 가설을 세우지 않았나. 빵을 먹는 버스기사에게 왜 정확한 행선지를 묻지 않았나. 조식은 또 왜 그리 많이 먹어서 늦게 나왔나. 왜 좀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나. 어제 왜 버스시간을 더 꼼꼼하게 확인 안 했나.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화를 낸다.


다음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자책은 멈추지 않는다. 기차역 앞 정류장에서 내리니 비가 온다. 비를 맞고 돌길 위로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으로 간다. 구글맵을 확인할 때마다 빗방울이 목적지를 가린다. 역에 도착해서 새로운 기차표를 사고 덜덜 떨면서 기다린다. 날씨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실망에 몸이 떨리는 게 아닐까.


KakaoTalk_20180323_001255876.jpg 이 기차표를 얻기까지 나는 무엇을 잃었는가!


첫 여행 때는 나 자신에게 굉장히 관대했다. 착오와 실수가 기본값이고 잘 해내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여행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스스로에 대한 기준치도 높아졌다. 회사와 집에서 내게 설정한 기준치가 부담스러워서 벗어나려 온 여행인데 또 하나의 기준치를 자발적으로 만든 거다.


앞으로도 여행은 계속 될 거다. 여행이 일상이 될 때쯤 낭만 대신 빡빡한 기준이 여행을 지배할까. 매번 혼자 여행을 하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날 응원해줄까.


이런 생각 끝에 결론은 '자책하지 말자' 대신 '자책할 상황을 만들지 말자'가 된다. 일상에서도 실천 못하는 것을 여행이라고 단숨에 할 순 없으니까. 피렌체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다음 일정을 꼼꼼하게 확인한다.


KakaoTalk_20180323_001325760.jpg 피렌체 조토의 종탑에서 본 해질 무렵 도시전경. 이것까지 놓쳤으면 얼마나 더 자책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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