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말고 다른 감각을 열어보다
작년 9월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은 바르셀로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해서 예약한 숙소로 갔다. 부킹닷컴에서 여러 조건을 생각해서 예약한 호스텔이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카탈루냐 광장에 내려서 걸어서 오 분 거리인 숙소로 갔다. 도착해서 체크인하고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올라간다. 내가 묵는 4인실에는 이미 두 사람이 와있는데 짐을 정리하며 들어보니 여기 와서 친해진 사이 같다. 짐 정리가 끝나고 나서 생각한다. 이제 이곳이 내가 여행 내내 '집'이라고 부를 곳이다.
다음날 아침 세면도구를 챙겨서 공용 샤워실로 간다. 샤워실은 세면대 몇 개와 칸막이를 친 샤워부스 몇 개로 이뤄져 있다. 샤워부스 속 샤워기는 은색의 고정형이다. 동네 헬스장과 같은 디자인이라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피트니스 클럽에 와있는 기분이다.
샤워를 하면 항상 다음 동작에 대해 떠올린다. 머리에 물을 적시면서 샴푸를 짤 생각을 하고, 샴푸를 머리에 문지르면서는 빡빡 헹궈낼 생각을 한다. 샴푸를 거의 다 헹궈낼 때쯤 되어서야 샤워부스 안에 거울이 없음을 깨닫는다. 다음 동작은 면도다. 쉐이빙폼은 없을지언정 거울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둘 중 무엇을 포기했을 때 얼굴에 상처가 더 많이 날까. 샤워를 마치고 세면대에서 면도를 하긴 귀찮아서 면도를 시작한다.
먼저 손으로 얼굴을 만진다. 볼과 턱, 코와 입술 사이를 전반적으로 만지면서 내가 자를 수염의 위치를 파악한다. 지도처럼 수염의 위치가 머리에 그려지면 쉐이빙폼을 얼굴 아래쪽에 고르게 바른다. 바르다가 떨어진 수염이 가슴 위로 떨어지는데 이때부터는 가슴이 일종의 팔레트 역할을 한다. 얼굴에 쉐이빙폼이 부족하면 물감을 덜어쓰듯 가슴 위에 묻은 쉐이빙폼을 손에 묻혀서 얼굴에 리필해주면 된다.
관건은 면도기다. 면도기를 뜨거운 물에 달군 뒤에 얼굴선부터 자르기 시작한다. 수염이 굵은 편이라 약하게 자르면 티도 잘 안 나지만 아침부터 피를 보고 싶진 않기에 최대한 살살 자른다. 거울은 없지만 은색의 샤워기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되어 보인다. 거기에 의존해서 얼굴선, 볼, 턱, 코 쪽 수염을 차례로 자른다. 면도기를 샤워기로 헹궈줄 때마다 피가 묻어나지만 아직 깎을 수염이 많으므로 외면한다.
면도가 끝나고 샤워까지 마친 후에 샤워부스에서 나와 세면대 거울로 얼굴을 본다. 상처가 좀 났지만 거울이 없던 것 치고는 선방이다. 얼굴의 감각에 이렇게까지 집중해 본 적이 있었나. 거울 앞에서는 눈에만 의존했던 감각이 얼굴과 손에 좀 더 공평하게 분배되어서 눈이 덜 피곤하다. 감각을 위해 거울을 없애겠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이곳에 묶는 삼일 동안은 좀 더 날이 선 얼굴 근육을 유지할 예정이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바르셀로나의 첫 지하철을 탄다. 오늘은 몬주익성에 간다. 만지지 말라고 적혀 있지만 않다면 성벽을 직접 만져볼 것이다. 눈의 과부하를 손, 코, 귀에 덜어줘야지. 몬주익성의 감촉, 구엘공원의 냄새,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모래소리를 기억해서 가져가야지.
언젠가는 모든 감각의 날이 서서, 거울 없는 면도처럼 눈을 감고 여행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