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K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다.
외로움이 내 생각을 점령할 때
하늘은 견딜 수 있을 시련만을 준다고 했다. '양 사나이'가 나타난 것은 그 상황을 내가 견딜 수 있게 내 안에서 마지막 장치를 만들어 낸 것일 수 있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생각들에 의해 나 자신이 잠식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였다고 하여 모든 이슈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회사에 가야 하고, 회사의 이슈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며, 나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생각들을 기록하고, 걷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변화가 나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날도 생각이 나를 점령하고 있을 때였다. 그 생각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나의 은밀한 잘못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그것이 오해에 의해 그런 것일 땐 당당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내가 했던 잘못된 행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그것에 대한 변명조차 하기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끔찍하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빠지다 보면, 실제 내가 하지 않은 일까지도 그 사실관계의 파악이 모호해진다. 계속 사람을 죽였다는 소리를 듣다 보면 내가 실제 사람을 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한 생각들이 나의 숨을 조여올 때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던 나는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약간 음산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걷다 보니 그 생각들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편의점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형, 형 하는 소리에 근처에 가서 보니 K였다. K는 혼자 편의점 앞 밴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K를 처음 만난 건 헬스장에서였다. 그는 스쿼트를 할 때 신음소리와 고함소리의 정확히 중간 정도의 소리를 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시끄럽게 운동하는 K를 좋게 보지 않았다. 나 역시 몇 번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대화 속 욕이 절반인 그와 도저히 친해질 수 없었다. K는 다짜고짜 앉으라고 했고 우리는 술을 마셨다.
"형 나는 지금 무저갱의 끝에서 살고 있어" K는 술에 취해 말했다.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고, 주위에 있는 동료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나는 말했다. "그냥 죽여버리면 쓰나. 한 명씩 잡아 두고,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면서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해 줘야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K는 그건 좀 비 인륜적이라고 했고, 나보고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우리는 그냥 웃었다. 그래도 그렇게 누군가 나의 상황을 이해해 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좀 안정이 되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그 개구리가 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던지는 위치에 서야 한다고. 그러나 K나 나 모두 회사 내에서 돌에 맞은 개구리였다. 그들이 던지는 돌에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아 버렸다. 한번 터진 머리를 가지고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우릴 보며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더 큰 돌을 던진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돌은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한 루머, 이간질, 잘못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의감 등으로 발현되었다. 실제로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냥 익명이니까, 그 댓글들이 재미있으니까, 이 것이 정의니까, 라며 낄낄거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상황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해결 방법을 찾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했다. K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겠다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옆에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우리 둘을 만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