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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간장종지와 태평양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1)

“나, 그만둘까 해요.”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한다. 결혼 2년 차. 식탁 한편에 쌓인 각종 고지서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될까? 정말, 정말 그래도 될까?


“응, 알았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혹시 질문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 저녁 운동이라거나, 매달 하는 유니세프 기부를 그만두겠다는 것으로 생각한 건 아닌지?


“언제까지 나갈 거예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스팸 한 조각을 숟가락에 얹어주며 아내가 말한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불안감이 깊어져 간다. 내가 예상한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다음 주 쯤 회사에 이야기할까 해요.”


당신만 괜찮다면, 하고 덧붙인 목소리가 갈라진다. 밥알 가득한 숟가락이 무겁다. 한껏 움츠러든 내 목소리와 달리, 침착하고 여유로운 표정의 아내는 잠깐의 침묵 뒤 “응. 그래요”라고 말할 뿐이다. 


내심 이런 장면을 상상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과
아내의 깊은 한숨
그리고 원망 섞인 눈빛


내심 이런 장면을 상상했다. 


“나 그만둬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 자동차 할부금이랑 대출이자는 어떻게 하려고? 대출 원금은 어느 세월에 갚고?. 아니, 그래서, 그만두고 나면 뭘 하려고요?”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과 아내의 깊은 한숨, 그리고 원망 섞인 눈빛. 


“안돼요. 하다못해 대출금이라도 다 갚고 나서 이야기해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내의 폭풍 같은 질책이 쏟아지면, 어깨를 잔뜩 움츠린 나는 조용히 밥그릇만 쥔 채 깨작이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장면을 예상했었는데.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는 나의 퇴사 선언을 “내일 비가 온대요.”라거나 “내일 회식이 있어요.”라는 말 정도의 무게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숟가락을 떨굴 만큼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멍하니 날 바라보며 의문 가득한 표정 정도는 지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치 인터넷 뉴스 가십 기사를 보고 난 후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듯이, 아내는 이내 주제를 바꿔 소소한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어갔다. 신입사원 교육이 시작되었다고, 신입 중에 여자를 너무 밝히다가 실수해서 문제가 된 머저리가 하나 나왔다고, 회사를 나서는데 웬 포르셰 한 대가 회사 주차장에 서있더라고, 얼마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옆 부서 부장님 차인 것 같은데, 임원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고.


밤 12시가 되어 자리에 누울 때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속내가 궁금하다. 생활을 어떻게 이어 나갈지를 걱정하는 건 나뿐인 건지.


“안 물어봐요?”


“뭐를?”


“왜 그만두는지, 그만두고 나서 뭘 하려고 하는지.”


코 끝까지 끌어 덮은 이불을 내리고 아내가 나를 바라본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스탠드 불빛에 반짝인다. 


“많이 고민한 거 아니에요?”


“응.”


“우리 결혼할 때 봤던 내 사주 기억나요?”


“글쎄.”


“그 할머니가 그랬어요. 간장종지 같은 남자를 만나면 간장종지 같은 인생을 살고, 태평양 같은 남자를 만나면 태평양 같이 살게 될 거라고.”


얼핏 들었던 이야기 같다. 사주 같은 것은 잘 믿지 않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이불을 다시 끌어 덮으며 아내가 말한다.


“날 간장종지에서 살게 만들지 말아요.”


날 간장종지에서 살게 만들지 말아요.


이내 곯아떨어지는 아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잠든 아내의 표정은 평화롭다. 


어쩌면 말려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아내의 반발을 그려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내는 아리송한 말만 남긴 채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간장종지와 태평양. 회사를 다니는 나는 간장종지 같은 사람이었던 걸까? 회사를 떠나고 나면, 나는 태평양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일까? 내가 태평양이 되면, 아내는 흰 긴 수염고래가 되어 유유히 헤엄치게 될까? 하나 둘 피어오르는 생각이 개연성을 잃고 감겨오는 두 눈 뒤로 벚꽃처럼 흩어져간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아내의 목소리. 날, 간장종지에서, 살게, 만들지, 말아요.


맥 빠질 정도로 허무하게, 나의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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