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5)
“넌 다 좋은데 뒷심이 너무 부족해. 한 번 시작한 것은 끝을 맺을 줄 알아야지.”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취기 오른 푸념이었다.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인턴과 아르바이트 사이를 오가는 아들이 30년 근속 교육 공무원 아버지에게는 적잖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한 번 남자가 마음을 먹고 시작을 했으면 마음에 안 들어도 끝을 볼 줄 알아야지,라고.
놀고 있는 아들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을 것이다.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했던 것도, 회사를 그만둘 예정이라는 말에 가장 상심이 크셨던 것도 아버지였다. 은퇴 후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시는 아버지에게, 자랑거리였던 크기만큼 놀고 있는 아들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을 것이다.
“친척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다시 자리를 잡을 때 까지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괜히 친척들 입에 오르내려서 너도 좋을 것 없잖니.”
설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의 눈치를 보시던 어머니의 소곤대는 목소리에는 아버지의 상실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주 가까운 친구 외에는 아무에게도 퇴직 소식을 전할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친척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넘쳐나는 시간의 대부분을 산 중턱의 고요한 집에서 보내게 되었고, 그 안에는 외로움의 크기만큼 고요한 평화가 있었다.
“누가 보면 문 앞에 바리케이드라도 쳐놓은 줄 알겠어요. 너무 집에만 있지 말고 바람이라도 좀 쐬러 다녀요. 그러다 우울증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통장에 용돈을 좀 넣어놨어요, 라며 아내가 말한다. 나가면 모든 게 다 돈인데, 라는 말에 아내가 도끼눈을 뜬다. 사마귀 앞에 선 애벌레가 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아내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 오전 10시. 담배를 보루째 사놓고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떨어진 담배를 사기 위해 청바지에 후드 티, 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선다. 구부러진 길을 따라 내려오기를 몇 백 미터, 살얼음이 녹아가는 하천을 따라 2차선 도로가 뻗어 있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공장과 식당. 기왕 이렇게 된 거, 동네와 조금 친해져 볼까 싶은 마음으로 옛 출근길의 반대편을 향해 발을 옮긴다. 비좁은 도로만큼이나 폭이 좁은 인도가 위태롭다.
얼마나 걸었을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회관 표지를 시작으로 미장원, 방앗간 같은 빛바랜 간판들이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 곳 사람들은 여길 뭐라고 부를까? 시내? 읍내? 90년대에 멈춰 선 것만 같은 거리의 소경. 몸빼바지에 바가지를 든 할머니와 새마을 운동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쓴 새까맣게 탄 할아버지. 그 사이로 드문 드문 보이는 국적 불명의 외국인 노동자들.
“처음 보는 총각이네. 이사 왔어?”
동그란 담배 간판이 달린 문방구에서 아주머니가 묻는다. 네, 이사 왔습니다,라고 간단히 답한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 직장은 안나가? 눈동자도 말을 할 수 있다. 아주머니의 시선에 쫓겨 담배 한 갑을 냉큼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선다.
가벼운 산책이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점심때가 다 되었다. 언제 붙여놓았는지 현관에는 중국집 배달 광고지가 붙어 있었다. 이런 곳까지 과연 배달을 해주는 걸까. 우리는 진정 배달의 민족임을 이렇게 증명한다. 짜장면은 정말 오랜만이다. 회사 옆 골목에 있던 그 중국집이 면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뽑았었는데. 휴대폰 너머 무뚝뚝한 목소리의 중국집 사장님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수화기를 내린다. 그리고 전화를 끊는 속도 못지않게 빠르게 울리는 현관 벨 소리.
무슨 일 해요?
“무슨 일 해요?”
짜장면과 군만두를 내려놓으며 몸 쪽 꽉 찬 돌직구를 날린다. 회사 다녀요,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준비된 인터뷰 답변처럼.
“쉬는 날인가 보네. 요즘 참 경기가 어렵지.”
난개발 빌라촌 같이 콧수염을 쓰다듬던 중년 배달부는 돈을 받아 들고, 가게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이사 왔죠? 원래는 여기 예쁜 간호사 아가씨 부부가 살았었는데. 아, 이 동네는 신호등이 없어서 사고 나면 무조건 7대 3이에요. 시내로 가려면 이 쪽 길로, 서울로 갈 때는 저쪽 길 따라서 나가면 되는데, 중간에 산을 타고 넘어가는 길이 있어. 거기로 넘어가면 길은 좁은데 진짜 빨라. 그나저나 요즘 정치가 아주 개판이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난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저 “네, 그렇군요, 그러게요. 참 걱정이죠.” 와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다.
“맛있게 먹어요. 접시는 아래 우편함 밑에 내려놓으면 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중년의 콧수염이 말한다. 닫히는 문 뒤로 아버지의 한숨이 들려온다. “한 번 시작한 것은 끝을 맺을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지.”라고.
머지않아 나는 아마도
'집에 있는 그 백수 총각'이 될 것이다.
살짝 불어버린 면과 차갑게 식어버린 군만두로 허기를 채운다. 창 밖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 아기자기한 건물 사이로 드문 드문 보이는 사람의 흔적. 이 곳에는 나를 숨겨줄 인파가 없다. 머지않아, 나는 아마도 ‘집에 있는 그 백수 총각’이 될 것이다. 아버지의 쓸쓸한 옆모습 때문인 걸까. 분명 내가 선택한 것인데, 어쩌면 나는 부끄러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옆 골목, 그 중국집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그릇 가득 담긴 짜장면을 꾸역꾸역 입 속에 밀어 넣으며, 계속해서 되뇐다. 어쩌면, 부끄러운지도 몰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