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답노트 03화

쓰고 싶은 글과 쓸 수 없는 글

02. 나는 대체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by Kyle Lee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1년 동안 연재하던 칼럼의 마지막 화가 실린 잡지가 발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편집장님이 인사를 건넸다. 독자들의 피드백이 무척 좋았던 코너였다는 말에, 언젠가 다시 인연이 닿아 함께 작업하기를 기대한다고 답했다. 그렇게 1년간 반복되었던 나의 일상 하나가 끝을 맺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대단한 자부심이나 성취감이 있었던 것도, 일의 끝맺음이 오는 개운한 뒷맛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분리수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느낌이랄까. 별다른 감흥도, 감동도 없는 프로젝트의 종결이라니. 어쩌면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이 아니어서 그런 건 아닐까. 꾸역꾸역 필요에 의해 썼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선호와는 관계없이 나의 주력 상품은 실용 카테고리이기 때문이리라. 나의 필요가 아닌 독자의 필요에 따라 쓰는 글이기 때문에. 그러니 그 성취감도 무게를 잃게 되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나는 대체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걸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자,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난제이기도 하다.


한창 왕성하게 글을 쓰던 학창 시절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대학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도매가에 얼렁뚱땅 넘겨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평생의 업이라고 자부하던 글쓰기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조금만 더하면 20년을 꽉 채운 표류기가 될 판이다.


내가 처음 글로 주목을 받았던 것은 시를 쓰면서부터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유치원 때와는 달리 ‘숙제’가 생겼다. 가장 먼저 내게 주어졌던 숙제는 그림일기였다.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 일기를 적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숙제가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대충 도형 몇 개로 그려 넣은 그림과 삐뚤빼뚤 커다란 크기로 적은 글씨가 종이 한 바닥을 가득 채웠다. 30분이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숙제였다. 큰 고민 없이 1년 내내 적당히 혼나지 않을 선에서 숙제를 ‘해결’ 한 후 놀이터로 달려 나갔다. 그림일기 숙제는 나의 소중한 놀이시간을 그리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일기는 나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 돌아왔다. 2학년이 되자 이제는 그림일기가 아닌 그냥 ‘일기장’을 숙제로 적어야 했다. 커다란 그림 칸이 사라지고 빽빽하게 자리 잡은 선들이 나의 글씨 크기를 한없이 줄어들게 만들었다. 종이 한 바닥을 채우는데 드는 시간은 2배, 3배로 늘었고 그만큼 나의 놀이 시간은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절망적인 사태를 대체 어떻게 해결하면 좋단 말인가. 놀이터에서는 친구들이 소란스럽게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아니다. 어떻게든, 무슨 수라도 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해답은 교과서의 맨 뒷면에 있었다.

해답은 교과서의 맨 뒷면에 있었다. 바른생활 교과서의 맨 마지막 장에는 동글동글 예쁜 삽화와 함께 동시가 적혀있었다.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이거다.


동시를 흉내 내어 일기장에 시를 적었다. 시는 내게 완벽한 언어의 마법이었다. 두어 단어만 쓰면 줄을 바꿀 수 있다. 심지어 단어 하나만 쓰고도 줄을 바꿀 수도 있다. 세네 줄 정도에 나눠 한 문장을 적고 나면(심지어 한 문장을 완결된 형태로 적지 않아도 된다!) 한 줄을 꽁으로 띄어 넘어 쓸 수 있다. 1학년 때 쓰던 그림일기보다 쓰는 글자가 더 적었는데도 시 한 편으로 종이 한 장이 가득 찼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가 무섭게 일기장을 덮고 놀이터로 뛰쳐나갔다. 뒷일이 무서웠지만 일단은 놀고 봐야 했다. 오늘은 술래잡기를 하기로 한 날이니까.


다음 날 아침에 제출한 일기장을 종례시간에 돌려받았다. 일기장 밑에 빨간색 펜으로 선생님이 감상을 적어주시곤 했다. 아마 혼나겠지. 요령 피운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혹시 어제 일기도 다시 쓰라고 하면 어떡하나. 오늘 이틀 치를 한꺼번에 쓰려면 정말 힘들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펼쳐 든 일기장에는 선생님의 보라색 ‘참 잘했어요’ 도장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빨간색 펜으로 선생님의 극찬이 이어졌다. 아직 배운 적이 없는 '시'를 썼다는 것 자체가 선생님께는 놀라운 모양이었다.


참 잘했어요.


부끄럽지만, 이 ‘참 잘했어요’ 도장은 태어나서 선생님께 들은 최초의 칭찬이었다. 많이 늦되었던 나는 남들 다 하는 전교 1등이나 반장 같은 것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남들이 반에서, 전교에서 1, 2등을 겨룰 때 나는 뒤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심지어는 꼴찌를 해도 별 감흥이 없을 정도로, 나는 무언가를 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내가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다. 일기장을 보신 어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우리 아들이 이런 재능이 있었네. 아빠한테 예술가 재능을 물려받았나 보다 하시면서.


이후, 나의 일기장은 꽤 자주 시로 채워졌다. 잘한다는 칭찬이 계속되자 스스로 정말 잘하나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잘한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장래희망을 묻는 칸에는 자연스럽게 ‘시인’이나 ‘작가’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고, 그렇게 나는 꾸준히 글을 써나갔다.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꽤 많은 재야의 작가들을 스쳐 지나갔다. 자비로 시집을 출판하셨던 중학교 사회 선생님. 작은 규모로 지역 문학회를 운영하시던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 노래 가사를 쓰는 독서실 총무 형. 나의 꿈을 응원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진지하게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등단의 꿈’을 꾸게 되었다. 정식으로 ‘작가’라는 명칭이 내 이름 뒤에 붙게 되는 그 어느 날을 그리며 글을 쓰고 또 쓰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신춘문예의 벽은 높았다. 메이저 신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여러 문학 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회에서도 꽤 여러 번 나는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설을 쓰던 친구가 내게 어느 문학 월간지를 알려주었다. 이 문학지는 매월 원고를 접수하고 입상자의 작품을 월간지에 실어준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껴두었던 시 몇 편을 추려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출판사로부터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다. 1년에 딱 한 명에게만 준다는 신인문학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이었다.


도전하지 않고 이룬 목표는 그 빛을 잃는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신인문학상이란다. 그럼 나는 등단작가가 되는 것일까? 다음 달 월간지에 실린 나의 작품과 당선 소감, 그리고 심사평이 지면을 채운 것을 보자 실감이 났다. 그렇구나.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목표를 이루었구나. 한참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그 높아 보이던 벽이 슬그머니 내 등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순적 이게도, 나는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등단을 하고 나면 글을 쓰며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메이저 문학계에 인맥도, 스승도 없었던 나는 주류 문학의 무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변방의 사막 같은 곳에 홀로 서있었다.


막막했다.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을 느꼈다. 가장 벽이 높은 곳에서 전력으로 기어올랐어야 할 목표였는데, 슬그머니 벽을 휘돌아 낮게 무너진 곳을 찾아 성벽 안으로 폴짝 뛰어들어간 느낌이었다. 이러고도 내가 목표로 했던 작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내 글을 봐줄 독자를 찾을 수나 있을까. 도전하지 않고 이룬 목표는 그 빛을 잃었고, 나는 꽤 오랫동안 글을 떠나 뒤늦게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학원을 나와 어렵게 직무를 정해 취업을 했다. 늘 그렇듯 운명은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전력을 다해 뒤통수를 친다. 뻑! 삼성그룹의 한 계열사 인사팀으로 들어가 채용 업무를 담당했던 것을 계기로 취업과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취업 시장에 팽배한 가짜 정보들을 걸러내고 진짜 제대로 된 취업 조언을 전달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은 브런치 프로젝트 은상, 위클리 매거진 연재, 피키캐스트 외부 에디터, 대학 및 공공기관 강의, 그리고 각종 취업 채용 플랫폼에서의 칼럼 연재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인사업무 직무서 집필로 이어져 카카오페이지 실용서적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했다.


목표 없는 성공은 기쁘지 않다.


살면서 나의 글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읽은 것은 처음이었다. 몇 백만 조회수가 찍혀있는 브런치와 피키캐스트 통계 페이지를 보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요즘 활동이 왕성하시네요. 너무 잘 나가는 것 아니에요?”


작가이자 교수이자 디자인 회사 대표인 한 능력자 지인이 말했다. 카카오 채널과 다음 포털 일면에 연속으로 몇 번 글이 노출되자 온 연락이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겸양 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진심으로, 이 활동이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에 나온 표현이었다. 상대가 느끼기에 겸손이었던 말들은 사실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조심스러운 고백이었다.


나는 이렇게 주목받는 나의 글 앞에 당당할 수 없었다. 얼떨결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진 글이었지만, 정작 내가 진정으로 목표했던 글은 아니었다. 내 글의 가치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고, 스스로 가치를 자신할 수 없는 글에 자부심이 생길 리 만무했다.


다시 출발점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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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걸친 칼럼 연재가 끝났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얻었다는 편집장님의 피드백에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잘것없는 글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시간, 내가 해왔던 잘못된 선택에 대해 되짚어본다. 쉽게 가려하지 말아야겠다. 남들이 뭐라 하건,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 그래서, 이기적이더라도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출발점에 서서. 순수하게, 그저 쓰겠다는 일념 하나로 밤을 새우던, 그 뜨거웠던 때로 돌아가서.




[작가의 말]
글 : Kyle Lee (https://brunch.co.kr/@kylelee)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려구요."

그림 : 매이 (instagram : @maywithmayday)
"월계수 숲을 너머 미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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