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어둠이 덮쳐온다. 그 어떤 징조도 없이.
기술의 발전은 인터넷을 통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지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스크린 너머에는 사막의 색으로 된 도시가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납작 엎드린 도시에서는 군데군데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고 건물보다 아주 조금 높이 흙먼지가 일었다. 고요한 대기를 느닷없이 찢으며 나오는 파열음과 대지를 타고 전해오는 진동은 이따금 거칠게 화면을 흔들었고, 이내 다시 잠잠해지기를 반복했다. 카메라가 놓인 낮은 흙담장 아래 잡초가 바람의 손길을 타고 흔들거렸다. 내가 본 진짜 전쟁의 모습이었다.
전쟁이 임박했다고 한다.
전쟁이 임박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러시아군 17만 명이 배치되었다고 하며, 연일 뉴스와 인터넷에서는 미국, 러시아, 유럽 사이에서 첨예하게 오고 가는 말과 반응을 다루었다. 2021년의 끝자락에 들려온 소식이었다. 올 한 해는 이토록이나 검고 무거웠다.
비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올 해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코로나는 델타를 넘어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악마로 진화하며 간신히 다시 돌기 시작한 거리의 생기를 앗아갔고, 아프가니스탄은 미군의 철수와 함께 탈레반의 집권이 이루어졌다. 미얀마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중국과 미국은 대만을 사이에 두고 새로운 대립을 시작했다.
매체를 통해 세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소식들을 접하다 보면 마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전쟁이 일어나고, 쿠데타가 일어나고,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다친다. 피 흘리며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사진과 처참하게 끌려가거나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영상이 난무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진짜 같지 않다. 화면에서 눈을 돌리면 고요한 방이, 피로에 찌든 지하철이, 바삐 움직이는 사무실이 있었다. 내가 놓인 현실에서 이 모든 소식들은 너무도 쉽게 색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소식들을 접하다가 문득,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저 활자로 된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영상의 한 자락이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행성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을 때, 내가 현실이라 인식하던 모든 것은 그 표정을 바꾼다. 아주 순식간에. 마치 원래부터 그러했다는 것처럼.
헬기 사고가 났대.
8년 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주말 데이트 약속이 있었던 나는 토요일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점심을 먹고, 커피숍을 가거나 인근 하천 공원에서 산책해야지. 주섬 주섬 가방을 챙겨 신발을 신고 있는데, 등 뒤에서 어머니가 외친다.
“헬기 사고가 났대. 뉴스에서 난리야. 헬레콥터가 아파트를 들이받았대.”
그러니까 조심해서 다녀, 라는 어머니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헬기 사고라니. 내가 어딘가에서 날아온 헬리콥터에 부딪혀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럴 확률에 걸릴 정도라면 그냥 로또를 사야겠다. 그 정도 확률의 악운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행운의 확률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 단지를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영화관까지는 걸어서 10분이다. 횡단보도를 세 번 건너고 언덕 하나를 내려가면 된다. 제법 여유 있게 나왔다는 생각을 하며 도로를 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 다른 어떤 위화감이 있었다. 길가에 줄줄이 늘어선 방송국 차량과 인도 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렌 불빛을 번쩍이며 늘어선 소방차와 순찰차, 그리고 엠뷸런스.
고개를 들어 높이 솟은 옆 단지 아파트를 보았다. 빌딩의 허리쯤에 커다란 구멍이 나있다. 뉴스 속 헬기가 부딪친 아파트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있는 곳 직선으로 300미터가 될까 말까 한 곳에서, 나는 화면으로 보던 뉴스가 중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현실이라고. 뉴스에서 언급되었던 ‘안타깝게 숨진 두 사람의 파일럿’은 바로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숫자 2로 표시되었던 바로 그 두 사람은 얼굴을 가지고 숨을 쉬며 가족과 사랑의 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나처럼 자신만의 일상과 삶을 가진 사람. 알고는 있었으나 차마 깨닫지 못했던 진실이었고, 스크린 너머의 이야기가 남의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2021년이 저물어간다.
2021년이 저물어간다. 올해는 특히 좋은 이야기보다 좋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린 것만 같다. 종전 선언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전쟁의 위협도 함께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살아가는 삶과 맞닿아 있다. 내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벌어지고, 그곳에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나는 간혹,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진 것들로 태어난 어둠이 나를 덮쳐올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내게 역할이 없었던 그 모든 사건의 결과는 나의 삶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햇살이 닿지 않는 어두운 지하를 걸어, 나의 그림자에 조용히 스며든다. 그리고 일순간 나의 현실을 뒤집어 놓을 순간을 기다린다. 그 어떤 징조나 예고 없이.
오래전, 미군 부대에서 복무를 했던 나는 간혹 활주로 주변을 뛰며 운동하는 미군들과 간단한 수다를 떨곤 했다. 땀을 닦으며 물을 한 잔 줄 수 없겠느냐는 그에게 물을 건네며 물었다.
“열심히네. 오늘따라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아 보이고. 무슨 일 있어?”
“곧 체력 테스트가 있어. 통과하려면 준비해야 해. 넌 여기서 무슨 일 해?”
“방공포야. 활주로 방어. 여기선 보이지 않아도, 이쪽 건물을 돌아 나가면 방공포가 있어. 우린 긴급 대기조라서 여기서 3주 동안 지내다가 다른 진지로 갈 거야.”
그렇구나. 물을 다 마신 그가 컵을 내밀며 답한다. 한국은 좋은 나라야.
“한국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다른 곳에도 가봤어? 한국 오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어?”
“아프가니스탄.”
그가 답했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배속을 받았다고, 돈이 없어 대학을 마칠 수 없어 군대에 들어왔다는 그는 미국에 돌아가면 이제 대학에 복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어.”
그곳은 위험하지 않았느냐는 말에 그가 답했다. 크게 다치는 일 없이 복무기간을 마칠 수 있어서. 그리고 한국에 배속될 수 있어서.
“여긴 안전한 곳이야. 적어도 당장 전쟁이 날 것 같지는 않거든.”
그에게 한국은 무척 평화로운 곳이었다. 드넓은 평지가 펼쳐진 평택의 곡창지대 저 끝으로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지는 곳. 바람에 익어가는 벼가 춤을 추는 곳.
“잘 마셨어. 고마워.”
땀을 닦고 다시 달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짜 군인이었다. 전쟁을 경험해본 군인. 그리고 그는 곧 미국으로 돌아가 대학에 복학할 것이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시험을 보는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는 두 삶의 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나에게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 같은 느낌이었고, 내 그림자 속에 숨어든 어떤 존재 같기도 했다. 나의 그림자 속에서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림자 속에서 거친 짐승의 숨소리가 들린다.
2022년이 다가온다. 스크린 너머에는 여전히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대명사와 숫자로 내게 다가올 것이고,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세상은 느리게 흘러갈 것임을 안다.
올 한 해를 보낸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고, 고요했던 시간이었다. 부디 내년에도, 거친 짐승이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왕이면, 당신도 그림자에 숨은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기를. 내년에는, 어둠이 조금만 덜 짙어졌으면.
[작가의 말]
글 : Kyle Lee (https://brunch.co.kr/@kylelee)
“불행보다 행복이 더 많은 한 해가 되기를, 평화로운 2022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림 : 매이 (instagram : @maywithmayday)
"세상 모든 것이 안타깝고, 또 미안하고, 그럼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또 한 해를 보냈지요. 그래도 감사한 일이 조금 더 많은 2022년이 되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