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답노트 15화

어릴 적 젊은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한다

15. 아직은 혼자가 될 자신이 없어서

by Kyle Lee
아들이 있으니까 참 든든하고 좋네.


“아들이 있으니까 참 든든하고 좋네.”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거실에는 사다리차에서 내린 이삿짐이 한가득 쌓여가고 있었다. 미리 치밀하게 계산했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주셨던 가구 배치도에는 치수 오류가 가득했다. 이삿짐을 들여오면서 꽤 많은 가구의 배치를 임기응변으로 정해야 했다.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요.”


한껏 가슴을 펴고 뽐내며 이사 현장을 누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실수가 많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고개를 돌려 부모님을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이사가 다 그렇지 뭐. 미소 지은 얼굴 뒤로 마음 한구석이 주저앉는다. 전조 없이 덮쳐오는 쓰나미처럼 부모님의 거칠어진 손이, 주름진 눈이, 푸석하게 마른 머리숱이 두 눈 가득 담긴다. 이제는 부모님이 나이를 드셨구나. 일흔이 몇 달 남지 않은,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리는 게 익숙한 그런 나이가 되셨구나.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과연, 부모님이 없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느 화창하고 화사했던 오후를 기억한다.


어릴 적, 어느 화창하고 화사했던 오후를 기억한다.


아마도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일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입혀준 멜빵이 달린 짙은 갈색의 코르덴바지를 입고,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아파트 단지를 걸어가고 있었다. 발을 헛디딘 것인지, 아니면 멋모르고 뛰어다니다 스텝이 꼬인 것인지, 보도블록이 끝나는 지점에서 넘어져 다친 무릎을 부여잡았다.


“우리 아들 용감하네. 넘어졌는데 울지도 않고. 다 컸네. 아이 멋있어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흥겨운 노랫말처럼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눈물이 목까지 찼던 나는 꾹 울음을 삼킨다. 피가 배어 빨갛게 물든 무릎을 두 손으로 꾹 누른다.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는 안방 서랍에 넣어두었던 약상자를 꺼내어 드신다. 바지를 걷어올리고 후후 상처를 불며 약을 바른다. 전기가 오르듯 찌릿한 감각이 무릎을 타고 등줄기를 훑는다. 밴드를 붙이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이 맺혀온다. 엄살쟁이 막내아들을 달래는 어머니. 안방 창문 너머로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억한다. 나의 눈가를 닦아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을, 그 청명한 목소리를, 따듯한 숨결을, 품 안 가득 안아주던 온기를. 어머니는 요동치는 생명을 머금은 한 그루 버드나무 같았다. 향기롭고 따스했던,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젊음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불완전하고 연약하던 나를 감싸 안았던 부모님의 젊음이 거대한 울타리가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그 안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존재였다.


언젠가 부모님이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 순간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마치 태양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지구도 바사삭 부서지며 우주의 먼지가 되어 흩날릴 것을 아는 것처럼, 부모님의 죽음은 내게 그런 종류의 현실로 다가온다. 서서히 해가 져가고 있음에도, 언제까지고 대낮이 계속될 것만 같은 느낌으로.


instagram : @maywithmayday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있다.


작년 봄. 유난히 혹독하던 겨울을 지나 대지 깊은 곳에서 따스한 봄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던 그때, 친구에게서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았다. 한창 일이 바쁠 점심 직후의 피크 타임이었다.


“저기, 있잖아.”


어, 무슨 일이야? 웬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나의 질문에 뜸을 들이던 친구가 말을 잇는다.


“저기, 그러니까, 그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친구는 이 말을 끝으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어떻게 됐다고? 재차 묻는 말에도 핸드폰 너머의 친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어.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급한 업무만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짐을 꾸린다. 오후 2시도 채 되지 않아 사무실을 나서자 직원들이 묻는다. 이사님 어디 가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직원들에게 앞으로 3일 동안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말했다. 나 찾지 말아요.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급한 일은 김 이사님과 이야기해서 처리해주세요.


왔어? 고생이 많지?


장례식장은 회사에서 차로 15분이면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빈소에는 급하게 준비한 것이 티가 나는 어색한 아버님의 흑백 사진이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얼굴. 사진을 보자마자 친구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왔어? 고생이 많지? 망할 놈의 대통령 때문에 사업하는 사람들 다 죽어나게 생겼지! 이 개자….”


아버님의 첫마디는 늘 대통령 욕이었다. 역대에 누가 대통령이 되던, 당신이 누구에게 표를 던졌건 그건 알 바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첫마디에 익숙해지자 처음에 들었던 거부감이 사라지고 친근한 인사말처럼 들렸더랬다. 그 거침없는 욕을 바로 몇 달 전에 통화로 들었었는데. 안부를 여쭙자 아버님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로 빠르게 인사를 받고는,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 빛의 속도로 통화를 끊으셨다. 분명 그때만 해도 아버님은 잘 지내신다고, 너도 사업 잘하고 있지, 하고 물으셨다. 덕분에, 늘 감사합니다,라고 답을 드렸다. 굳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친구의 아버님은 서초동에서 작은 법무법인을 운영하셨다. 사랑하는 아들이 못난 친구를 둔 죄로 꽤나 귀찮고 피곤한 소송을 맡으시거나 무상으로 상담을 해주셔야 했다. 내가 스타트업 팀에 합류하여 사업 비슷한 것을 하게 된 이후로 피곤한 소송이나 분쟁이 생길 때면 선뜻 도움을 주시곤 했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돈도 되지 않는 피곤하기만 한 사건이었는데도, 아버님은 대표 변호사 신분에도 내가 부탁드린 사건을 늘 직접 처리하셨다. 소장 작성에서부터 답변서 작성, 그리고 법원 출장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시는 법이 없었다.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풀어주셨던, 내게는 정말 은인 같은 분이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상주가 된 친구와 맞절을 하고 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도저히 친구의 얼굴을 더 볼 수 없어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떨구었다. 볼썽사납게 왜 내가 유난인지. 상주는 잘 참고 견디고 있는데, 왜 내가 지랄인가 싶었지만 도무지 참을 길이 없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누군가 커다란 징을 울리고 있었고,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울림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친구는 아버지를 불편해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자수성가의 표본 같았던 아버님은 많은 형제들 중 가장 똑똑한 분이었고, 그래서 모든 형제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아버님의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달동네의 허름한 집에서 조그마한 좌식 책상을 앞에 두고 사법고시 준비를 하셨고 보란 듯이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어 모든 형제들과 부모님을 돌보며 한결같이 바쁘게 사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은 아들이 답답하셨던 듯하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 지원을 해주는데도 폭발력을 보여주지 않는 아들이 답답하셨을 것이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느긋하고 묵묵한 친구의 성향은 확실히 불꽃같았던 아버님과는 달랐다. 그래서 친구가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꽤나 스트레스를 많이 주셨던 듯했고, 그 탓에 친구는 아버님을 불편해했다. 한 번은 친구가 주말 아침에 집에서 쫓겨 나와 이렇게 하소연했으니.


“아침 다섯 시였나, 다섯 시 반이었나. 아버지가 사무실로 나가시다가, 아직 내가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엄청 마음에 안 드셨나 봐. 방문을 쓱 열어서 내가 자는 걸 보고, 방 문을 엄청 세게 꽝 닫으셨거든. 내가 그때 진짜 수직으로 일어났다니까.”


변호사 시험을 치른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을까. 시험에 모든 걸 쏟아붓고 모처럼 쉬던 친구의 하소연이었다.


“집이 도무지 편하지가 않아. 얼른 독립했으면 좋겠는데, 돈이 없네.”


그때는 그런 아버님이 괴짜 같고 재미있기만 했는데. 우리의 추억 속 아버님의 모습은 그랬다. 대학시절 같이 하던 아르바이트가 끝나자 지나가다 들렀다며 집까지 태워다 주시던 아버님. 술을 좋아하셔서 잔뜩 취한 모습으로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분.


나는 네가 제일 부러워.


장례식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커피잔을 문지르며 친구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아버지한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는 줄 정말 몰랐어. 인생에 큰 기둥이 하나 무너져버린 기분이야. 아버지가 하시던 일들이나 집안일을 정리하면서 내가 아버지에 대해 정말 몰랐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더라. ”


그런데 이제는 물어볼 수가 없네. 허탈한 목소리로 친구가 말한다. 나는 네가 제일 부러워. 너희 부모님은 다 살아계시잖아. 나는 지금 다른 거 다 모르겠고, 그냥 그게 제일 부러워. 나는 이제 아버지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이 갈수록 내게 의지하는 것이 많아지는 부모님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늘 의지하던 두 분이 약해져 가는 모습을, 나는 잘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나의 기억 속에 자리한 두 분의 빛나던 그 시절을, 점점 낡아가는 육신에 갇힌 두 분에게서 다시 찾아볼 길이 없다는 사실이 주는 남기는 감정의 흔적을 대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두 분이 떠나고 난 빈자리에서, 나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점점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희미해져 가는 젊은 시절의 부모님 얼굴처럼, 지금의 모습마저 안개처럼 흩어져버릴까 두려운 이 마음을 나는 과연 어떻게 감당해야 좋을까.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어떤 관계이고 싶은지.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는 이 귀중한 시간을, 나는 어떤 시간으로 채워가야 할까. 그리고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이고 싶으며,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을까.


어떤 기억으로 남고 싶을까.


이삿짐이 거의 다 제자리에 들어가고 정리도 다 끝나갈 때쯤, 어머니와 잠시 지친 몸을 쉬며 소파에 앉아 인부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 있으니까 편하고 좋지?”


어머니가 웃으며 답하신다. 그러게, 아들이 최고네. 어릴 땐 참 힘들게 하더니.


“그래도 내가 크게 속 썩이진 않았잖아요? 공부는 좀 안 했어도 큰 사고도 안치고 사춘기도 얌전하게 보냈는데.”


볼멘소리에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그랬지. 다른 애들에 비해서 얌전하기는 했어. 그래도 네가 쉬운 애는 아니야. 아니, 부모는 그래. 세상에 쉬운 자식은 없어.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혼자일 때는 모르는 많은 것들을 배우거든. 너도 얼마나 엄마 가슴을 많이 찢어놨는데.


“너 초등학교 다닐 때, 하도 공부를 못해서 학부모 모임에서 내가 완전히 뒤로 밀려났잖아. 희한하게 그런 모임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부모 몇 명이 완전히 분위기를 휘어잡아. 그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그때는 막 돈도 걷어서 담임선생님 선물도 하고 그랬었거든. 그런 학부모는 학기 시작하기 전부터 반 배정되면 어떻게 알고 미리 선생님이랑 연락하고 그러더라고. 돈은 다 같이 걷는데 생색은 공부 잘하는 애 부모만 다 내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나는 절대 돈 안 냈어. 돈 내라길래 계좌번호 보내세요, 하고 말았거든.”


쌤통이라는 듯이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연세대에서 아주 유명한 커플이었다. 당시 입학과 졸업 모두 수석을 차지했던 어머니와 동문회장을 맡을 정도로 인싸였던 아버지는 전교에서 뒤로 1, 2등을 다투는 막내아들의 성적 덕분에 삶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 체험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참 웃기는 게, 나는 자존심을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람인데, 자식 일이 되면 그게 그렇지가 않아. 나도 모르게 그냥 수그릴 수 있게 되거든. 그러면서 젊은 시절의 자만과 오만의 물이 빠지고 겸손하고 겸허한, 성숙함을 배우게 돼.”


그래서 자식을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 건가 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초등학교에서 담임 면담 때, 공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던 선생님에게 어머니는 열변을 토하셨다고 한다.


“얘가 공부만 못하지, 마음씨가 얼마나 따듯하고 정이 많은지 몰라요. 시를 얼마나 잘 쓰는데요. 얘가 쓴 시를 보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내는지 몰라요.”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그걸 사람들과 나누며 감동을 주는, 예쁜 아이예요. 성적 외에는 관심이 없던 선생님께, 내 아들은 이런 사람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고 한다. 공부 이외에도 중요한 게 많잖아요. 어디에서도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던 어머니의 자존심은 아마도 이때부터 조금 다른 얼굴을 하게 되었던 듯하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 독립한 지 어느덧 9년이 지났다. 부모님은 서울을 떠나 김포로, 그리고 나는 결혼과 동시에 몇 번의 이사를 거쳐 지금은 수원에 자리를 잡았다. 내비게이션 기준으로 약 65킬로미터. 왕복 3시간가량. 매일 보던 얼굴을, 이제는 일 년에 몇 번 보기도 힘에 부친다.


너를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늘 함께 있었어.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꿈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나의 말에 이렇게 답하셨다.


“그래? 나는, 한 번도 너랑 떨어졌던 적이 없는데.”


나는, 우리는 늘, 너를 생각해. 너를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늘 너와 함께 있었어.


생각한다. 정말 나는, 과연, 부모님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아직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아, 그저 조금만 더 건강하시라고, 그러니 운동을 열심히 하시라고, 끼니는 꼭 잘 챙기시라고, 못난 아들은 잔소리가 늘어만 간다.



[작가의 말]

글 : Kyle Lee (https://brunch.co.kr/@kylelee)
“가급적 부모님께 매일 한 번은 전화를 드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고 싶어요.”

그림 : 매이 (instagram : @maywithmayday)
“우주는 가본 적 없지만, ‘우주만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아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