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의 계획에는 죽음이 없음을 깨달았다.
(1)
“난 나중에 건담 같은 거대 로봇을 만들 거야. 진짜 만화에서처럼 작동하는 멋진 놈으로.”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다이어리의 속지에 편지나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유행이었고, 친구들에게 얼마나 많은 속지를 선물 받는지가 학창 시절 사회생활의 척도 같은 역할을 했다. 나 역시 다이어리를 하나 장만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같은 반에 있던 일진 무리의 한 녀석이 내게 자기 다이어리를 사라며 접근했다. 쓰려고 샀는데 다른 다이어리가 생겨서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이라며 이만 오천 원에 사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부드러운 가죽 커버로 된 제법 괜찮은 다이어리였다. 싸움은커녕 일진에게 대들 깡도 없었던 나는, 어차피 하나 살 생각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종례가 끝나고 집 근처에서 거래를 했다. 이 녀석은 꽤 많은 일진 무리와 함께 나타났다. 너무 많은 인원의 등장에 돈만 뺏기고 물건은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돈을 받은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쿨하게 뒤돌아 친구들과 함께 멀어져 갔다. 내심 안도하며 돌아서 집으로 가려던 때, 일진 무리에 있던 한 사람이 홀로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쟤가 너한테 오천 원 더 비싸게 판 거야. 쟤 이거 이만 원에 샀거든. 그냥 알고만 있어. 뭐라고 하지는 말고….”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거래 뒤에 놓인 거대한 음모를 폭로한 그는 일진 무리에서도 명실공히 1등으로 우뚝 선, 소위 ‘급’이 다른 녀석이었고, 유치원 시절에 나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초등학교에 들어가며 연락이 끊겼었는데, 중학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주변 학교에서도 꽤나 이름을 날리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학교를 정글이라고 치자면 이 친구는 전설 속의 매머드 내지는 코끼리의 왕 정도였으며, 나는 눈치를 보며 그 곁을 지나는 가젤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사연은 많았지만 여전히 꽤 근사한 다이어리가 생긴 것은 변함이 없었다. 가젤도 가젤 나름의 생태계가 있어서, 토끼나 다람쥐 같은 친구들이 하나둘씩 속지에 편지나 그림을 그려 선물해 주었다. 그중 한 친구는 백일장에서도 이렇게는 안 그리겠다 싶은 정성 가득한 그림을 그려주었다. 10대의 젊음은 정녕 쓸데없는 것에 더 많은 애정과 노력을 들이도록 이끄는 것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아무튼.
친구에게 물었다. 그림이 정말 좋다. 이렇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봐. 나중에 만화가를 해도 되겠어. 그러자 친구가 답했다. 아니, 나는 과학자가 될 거야. 과학자? 응. 건담을 만들 거야.
“건담을 만들 거야. 아니, 건담 같은 정말 멋진 거대한 로봇을 만들 거야. 만화에서처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로봇.”
나는 내심 친구의 그림 재능이 아까웠지만, 친구의 꿈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건담을 만들 거야.
아니. 거짓말이다.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대 직립보행 로봇이라니. 중학교 2학년씩이나 돼서 아직도 그런 만화 같은 꿈을 꾸고 있다니.
중학생은 그런 나이대였다. 아직 유치하고 어린 꿈을 꾸면서도, 자신이 충분히 어른이 되었고 성장했으며 세상을 안다고 착각하는 나이. 그 친구와 나는 꿈과 동화의 세계가 현실을 만나는 방대하고 짧은 스펙트럼의 어느 한 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다소 빠르게 현실로 옮겨가고 있던 나는 반 보쯤 느린 그 친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중 3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와 다른 반으로 헤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점심시간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의 교실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친구는 눈이 나빠졌는지 제법 두꺼운 안경을 끼게 되었다. 갑자기 사시가 왔다며, 안경 도수가 잘 맞지 않아 그런 것 같다는 안경사의 말에 안경 도수를 높였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이 친구와는 멀어졌다. 다른 학교로 가게 되자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2가 되고 5월이 되었다. 따스한 봄바람에 아카시아 향이 실려오던 어느 날, 중학교 동창 친구에게 전화를 받았다. 준헌이가 죽었다. 뇌종양으로.
“중3 때, 얘가 담임한테 완전히 찍혀서 하루가 멀다 하고 두드려 맞았거든. 담임이 매번 풀스윙으로 머리를 후려쳤는데, 뇌출혈이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아.”
종양 때문이었다.
사시가 왔던 건 종양 때문이었다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친구가 말했다. 이후에 무슨 말이 더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많이 흘렀고, 짙은 아카시아 향이 미지근한 온도로 주변을 감쌌던 것을 흐릿하게 기억할 뿐이다.
이후 꽤 많은 소문이 오갔다. 준헌이의 담임이었던 선생은 징계 같지도 않은 징계만 받고 넘어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알고 보니 그 선생이 이사장의 조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떤 소문은 부모님이 담임에게 눈치껏 줬어야 할 돈봉투를 주지 않아 애가 고생한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종양의 직접적인 원인을 증명할 수 없기에, 거기에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 모든 소문이 마치 다른 세상의 것처럼 느껴졌다. 색이 없는 그림 같이. 윤곽만 거칠게 그려진 스케치를 보는 것 같았다. 사방이 색을 잃고 거친 선이 뾰족하게 날을 세울 때면, 친구가 그려준 그림을 떠올렸다. 파스텔톤 색연필로 칠해진 정성스러운 그림. 친구가 말한다. 나는 건담을 만들 거야. 아카시아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그림 속에서 친구의 말이 주문처럼 울리면,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2)
“나는 여기가 더 편해.”
군대에서 만난 동갑내기 선임이 말했다.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철장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내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는 여기가 차라리 더 편하다고. 나가면 더 지옥 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고. 여긴 차라리 밥 세끼 꼬박꼬박 나오고, 잠도 충분히 재워주지 않느냐고.
나는 여기가 더 편해
나보다 딱 3주가 빨랐던 이 선임은 바깥에서 안경 관련 전공을 공부했다고 한다. 안경점을 여는 것이 꿈이라며, 안경사 월급이 썩 좋지는 못하지만 일단 경력을 쌓고 돈을 모아 자기 가게를 차리면 그때부터는 남부럽지 않게 벌 수 있다고 했다.
“안경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냐. 새벽에 시작해서 자정이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나. 실습 나가서 일할 때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
안경사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이 얌전하게 학교만 다니다 군대에 왔던 나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감히 상상이 되지 않기에 어설픈 공감마저도 들지 않았다. 하루에 잠잘 시간이 4, 5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는 그의 현장 경험담은 화면 너머 드라마 속 이야기 같았다. 대기업 재벌 3세의 삶만큼이나 나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
방공포 직무였던 우리는 미군 공군부대의 활주로 옆 풀밭에 세워진 초라한 단층 건물에서 살았다. 허허벌판에 외로이 던져졌던 우리는 매일 뜨고 내리는 전투기와 정찰기의 폭음에 시달리는 서로를 실없는 농담이나 간식거리로 달래주었다. 분대별로 계속해서 진지를 이동하며 살았기에 이 선임과는 6개월가량을 함께 살고 헤어졌더랬다. 천성이 선하고 통통한 몸집만큼이나 마음 씀씀이가 넉넉했던, 군대에서 천연기념물보다 만나기 어렵다는 ‘좋은 사람’이었다.
전역 후, 군대에서의 기억이 거의 남지 않았을 만큼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두드리며 꽉 막힌 차선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제대 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자대 동기의 전화였다. 침울한 목소리로 그가 말한다. 지학이가 떠났다고.
장례식장은 경기도 외곽의 허름한 종합병원이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익숙한 얼굴이 많이 보였다. 동기부터 후임들까지, 사회인이 된 그들은 내 기억 속 앳되었던 얼굴의 흔적만 조금 남아있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인에게 절을 하고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 이야기, 결혼 이야기, 군대에서 있었던 자질구레한 사건 사고 추억 이야기. 쉬지 않고 여러 목소리가 교차하며 테이블을 어지럽혔고, 소주와 맥주를 따르는 손이 분주했다. 그때, 내게 전화를 준 동기가 어깨를 톡톡 치며 말한다. 형, 나가자. 담배 한 대 피자.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물었다. 자다가 죽었대. 어쩌다가? 심장마비라던가? 과로지 뭐. 그 정도로 힘들었던 거야? 무리했나 봐. 형편이 원래 좀 좋지 못했잖아. 그래도…. 안타깝게 됐지 뭐. 너무 의외라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 이제 겨우 서른둘인데. 그게 문제가 아냐. 형수 어떡하냐 진짜.
형수 어떡하냐. 동기가 말했다. 그렇구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앳된 얼굴의 동생, 그리고 그 곁에 하얀 소복을 입고 있던 여자. 아마도 지학이의 아내일 그 사람. 그리고 그녀의 가득 부풀어 오른 배.
“예정일이 다음 달이래.”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다음 달 출산을 앞둔 예비 아빠는 고된 하루를 마치고 가라앉는 배처럼 잠이 들었을 것이다. 꿈속에 잠긴 그는 겹겹이 몸을 감싼 피로의 실타래를 부지런히 풀어나가다 지쳐 잠시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 찰나의 순간에, 운명은 그의 심장을 옥죄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그는 꿈속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에 이끌려 바닥을 스치듯 깜깜한 골목 속으로 미끄러져간다. 어디선가 낙엽 태우는 냄새가 났다. 그림자 속에서 그가 말한다. 나는 차라리 여기가 더 편해.
그의 남겨진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군대에서 연을 맺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이는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친했던 한 두 사람과 만나 식사나 커피를 마시는 정도일 뿐.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렷이 기억나는 대화가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또렷이 기억나는 대화가 있다. 너무도 평범한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나누었던 대화가 씨앗이 되어 어둠 저편에 묻힌다. 그 후로 오랜 시간 숨죽여 시간의 비를 맞던 씨앗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슬그머니 내 기억 속에 그 싹을 틔운다. 그렇게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날의 대화는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지고, 당신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우연히 스치는 바람처럼 귓가를 울린다. 마치 주문처럼. 그리고 예언처럼. 씨앗은 자라 점점 거대해지고, 귓가를 울리는 빈도도 높아져간다.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인다. 너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야. 그 어느 순간에, 예상치 못한 운명의 손길이 너의 뇌를, 너의 심장을 움켜쥘 거야. 그러면 너는 줄을 잃은 마리오네트처럼 축 늘어진 몸을 깊은 대지 아래에 누이겠지. 은은한 아카시아 향이 고요하게 스쳐가는 낙엽 사이로 퍼져갈 거야.
죽음이 뭔지, 나의 끝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순간까지도 내게는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삶을 계획함에 있어 죽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의 계획은, 어쩌면, 처음부터 많이 잘못된 방향으로 그려졌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작가의 말]
글 : Kyle Lee (https://brunch.co.kr/@kylelee)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 했던 두 고인의 평화를 빕니다.”
그림 : 매이 (instagram : @maywithmayday)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죽으면 무엇을 남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무사히 나아가고 있고, 고민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