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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Aug 26. 2021

아직도 계약서에 없는 '정'과 '의리'를 믿는다면...

좋좋소를 시청하다가 순수했던 그 시절의 계약서를 돌아보며

생에 첫 알바 때 사장님께 계약서와 월급 얘기를 꺼냈다가 정색을 맞은 적이 있다. 사장님은 어린 놈이 돈을 그렇게 밝히냐며 노발대발 했었는데, 역시 마지막까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구질구질한 이유로 알바비를 깎으려고 했었다. 3주짜리 단기알바라고 방심했던 나의 실수였다. 다행히 같이 알바를 하던 형이 그건 아니라고 나 대신 싸워줘서 일한 만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정규직이었던 직장에선 포괄임금제를 채택했었다. 당시엔 포괄임금제에 대해 잘 몰라서 그냥 계약서를 작성했다. 일을 잘해서 연봉을 올리면 되고, 근무시간에 집중해서 야근을 안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로자 1인당 할당된 근무량과 책임의 양이 과도한 시스템에서 야근을 하는 것과 실력의 높고 낮음은 별개였다. 심지어 일을 잘해서 야근을 안하면 일을 똑바로 안하는 것 같다는 지적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포괄임금제가 근로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억울한 제도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바로잡기엔 너무나도 늦었을 즈음. 회사와의 관계 악화로 회사를 떠나오면서 받게 된 전문가와의 상담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이건 말로만 포괄임금제고 그냥 불평등 계약인데요? 이거 말도 안되는 계약서예요. 요즘도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하나요? 스타트업은 젊은 회사라더니 더하네 더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분노 섞인 말에 나는 적지 않은 당황을 했다. 그동안 열정, 의리, 정, 함께 성장 같은 말로 똘똘 뭉쳐 나아가던 회사가 계약서 작성부터 나를 속이고 있었다니... 서운함과 억울함 분노 같은 감정이 요동쳤다. 전문가는 정상적인 포괄임금제 계약서의 예시를 보여주며 말했다.

"포괄임금제로 계약을 하려면 이렇게 최대 몇 시간의 초과근무를 포함할 것인지 적어놔야 한다고. 맥시멈이 없이 작성된 근로계약서는 노예계약서지! 심지어 포괄임금제로 계약을 해도, 약속된 시간을 넘기면 돈을 더 줘야해. 1.5배로 쳐서 더 줘야한다고. 이 계약서로 새벽까지 일하고 밤새 일해준거야?"


자신이 반복해서 불합리함을 집어 주어도 "아유 괜찮아요. 그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돼요. 일하면서 즐거웠고, 배운 것도 있었으니까 저는 괜찮아요"라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를 뱉는 내가 답답했는지, 전문가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침까지 튀겨가며 나 대신 화를 내주었다. 어쩐지 겨우 두 번 밖에 안본 그 사람이 첫 아르바이트 때 만나서 동고동락하다가 떼일 뻔한 알바비를 찾아주었던 그 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싸움 대신 유종의 미를 택했다. 그동안 쌓아온 정이 있었고, 나의 꿈과 비전이었던 회사를 진심으로 응원했기에. 그런 회사에 나로 인한 흠집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최근에 중소기업의 악덕 문화를 풍자하는 웹드라마를 보다가 나와 같은 상황을 발견했다. 드라마 속에서 퇴사를 앞둔 직원은 아쉬운 점이 있어도 정, 의리를 생각해서 참아왔다고 말하는데, 사장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한다. "의리? 무슨의리?"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의리, 정 따위의 감정은 나에게만 있었을 뿐 사장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애초에 저런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 각개전투를 훈련을 하다가 튄 진흙이 입속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까끌까끌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불현듯 회사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내가 멍청한 희생을 감내하면서 응원하던 회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충 서치한 결과. 회사는 그동안 해오던 서비스의 대부분을 종료하고 있었다. 이상한 만남 주선 어플리케이션 같은 것을 만들면서, 당시 직원들이 꿈꾸고 응원하고 자신의 열정과 청춘을 갈아 넣던 비전을 모두 없애버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실망스럽고 안타까웠다.


몇 년 전보단 수그러든 것 같지만, 요즘도 스타트업에 로망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작은 회사를 키워서 더 큰 가치를 나눠보자는 생각과 비전에, 첫 계약서의 내용 따위엔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은 것은 '나중에 잘할 사람은 현재도 잘한다는 것'이다. 같이 고생해서 나중에 많이 벌자는 달콤하지만 말도 안되는 유혹에 속지 말고, 계약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실력에 맞게 작성하길 바란다. 회사와 직원은 가족이 아닌 계약관계다. 계약서에 적히지 않은 의리와 정 같은 단어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럼에도 의리와 정을 담은 계약관계를 하고 싶다면. 사장이 되자. 좋은 사장을 만나는 것보다 내가 좋은사장이 되는 것이 쉽고 편하다.


포괄임금제 관련 기초지식


회사에 의리를 지키려던 중소기업 직원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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