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내가 날 정도로 고단하게 품을 팔러 다니는 쿠르드족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이라크와 이란을 사이에 둔 국경 마을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거라 곤 밀수품을 중개해주고 수고비를 받는 일이다. (참고로 쿠르드족은 터키, 시리아, 이란, 이라크에 걸쳐서 살고 있는 산악 민족이다. 인구는 대략 3,300만이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흰 눈에 덮인 산을 넘어갈 때마다 말들에게 술을 먹이는 장면에서 따온 제목이다. 시적인 제목에 비해 영화 내용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그날 추위의 정도에 따라 독주의 분량은 1병에서 4병까지 정해진다. 산을 넘어가기에 무거운 밀수품들은 마치 어린 노동자들을 고단하게 만드는 인생의 짐처럼 보인다. 말까지 취하게 만드는 혹한의 날씨. 게다가 주인공한텐 몇 달 밖에 못사는 동생이 있다. 동생의 수술비를 위해 누나 ‘조진’은 이라크로 시집가게 되고 주인공 하웁은 수술비 마련을 위해 노새를 끌고 국경선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간단치 않은 게 매복하고 있는 국경 수비대가 그들을 치려고 한다. 그들의 조건 자체가 열악한데도 더 곡진한 묘사를 위해서 그들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감독의 의도가 보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100% 자연산 아이들은 영화 그 자체이다. 헐리우드 식의 달콤한 감미료도 필요 없고 유럽의 난해한 접근도 필요 없는 테크닉이 따로 필요 없는 쿠르족 아이들의 삶 자체가 영화이다.
네팔 여행 중 포카라의 향자곳에서 근처 마을 오스탐을 마실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어린 학생들에게 꽃을 받았다. 꽃을 꺾으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꽃을 받는 순간 시엠립의 앙코르 와트가 떠오르며 순간 움찔했다. 5년 전에 갔었던 앙코르 와트의 근엄한 석벽 사이에서 출몰하는 소년들은 내게 풀꽃 반지를 건넸다. 그리고 1달러를 달라고 했다. 가난이 친구들을 관광지가 된 왕궁으로 밀어 넣었다. 무기력한 권력의 선조들은 앙코르 와트와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줬다. 아열대의 밀림에 세운 왕궁들 덕분에 관광객들을 상대로 손을 벌리게 했다.
영화 <가버나움>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닮은 구석이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 자인을 결코 앞질러 가는 일이 없다. 거리의 삶을 선택한 자인을 정면으로 찍는 일은 비윤리적이다. 대중영화의 카메라는 오랫동안 관객들의 마음을 찌르기 위해 익숙한 미장센으로 표현했다. <가버나움>은 자인의 얼굴 자체가 미장센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음을 얼얼하게 한다. 가난 때문에 동네 슈퍼마켓으로 팔려 간 어린 누이는 시체로 돌아왔다. 화가 난 자인은 슈퍼마켓 사내를 칼로 찌르고, 들어간 교도소에서 부모를 고발한다. ‘허락 없이 태어나게 한 죄’를 범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한다. 자인은 어린 동생들과 거리에서 앵벌이를 하면서 살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자인의 어머니는 또 임신했다.
청소년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아픈 시기다. 특히 최초의 선택은 때로 신중하지 못하고 그저 국가의 정책으로 혹은 연인들의 ‘욕망’으로 더 끔찍하게는 능욕으로 출생의 과정을 거친다. 필리핀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낙태 금지로 많은 싱글맘들이 생기고 있고 어린 자식들은 어른들의 무성의한 선택으로 가난을 물려받은 채 마닐라 호텔의 구석진 빌딩 모서리에 박스를 깔고 노숙을 하고 있다. 국가는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카메라와 관객과 동일시된다. 아니 공범자가 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대중영화에선 이런 무기력한 카메라가 태생을 망각하고 미디엄 샷과 클로즈업을 남용하고 있다) 나는 국가가 팔짱 끼고 있는 채 앙코르 와트의 성벽으로 소녀 소년들을 몰아붙이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생활의 마지노선에 내몰린 소년 병사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습관적인 기부행위로 인간의 의무를 다했다는 얄팍한 자기기만의 딜레마에 빠지기 싫었다.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은 채 그저 소년이 꺾어 온 꽃으로 삶을 버티게 하는 게 구조를 더욱 지속가능하게 하는 거 같았다. 그 당시 다녀왔던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라오스는 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은 사원에서 껴안아 준다. 그리고 탁발행위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가난의 빈틈을 채우는 적극적인 나눔의 의식이다. (라오스 국민은 사원의 승려들에게 공양하기 위해 아침마다 거리에 나온다. 공양을 받은 승려들은 다시 가난한 국민의 바구니에 공양받은 물품을 나눠준다) 국가와 사회가 관심을 가진다면 다를 수 있다는 걸 두 도시가 보여주었다.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아이슬란드의 CEO는 감독 마이클 무어에게 질문한다. ‘이웃이 배고프고 의료에서 배제되어 이웃들이 힘들어하는데 당신(미국)들은 어떻게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냐?’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이 질문에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고 극우 백인 우월주의자 트럼프는 아직도 흑인과 중남미인들에게 여전히 가혹한 차별의 회초리를 휘두르고 있다.
<가버나움>의 마지막 장면은 자인이 여권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장례식도 아니고 왜 그리 심각해’ 사진사의 핀잔에 고단한 삶의 무늬가 새겨진 주인공의 얼굴은 잠깐 웃픈 표정을 지으면서 끝난다. 자인의 행적을 카메라와 함께 따라다녔던 관객들은 아니, 나는 다시 앙코르 와트에서 소년이 건넨 꽃을 받은 관광객처럼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다. 나는 <가버나움>을 또 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