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샤인 Apr 11. 2021

체리엔딩

제 8 장 뻐뻐꾹 뻐꾹

엄마가 돌아왔다. 

육개월만이었다. 엄마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일어나지 못할거라 했지만 엄마는 기어코 일어났다. 물리치료사는 부러졌던 다리의 뼈가 완전히 굳어버려 무릎이 굽어지지 않을 거라 했지만 엄마는 이를 악물고 무릎을 구부러뜨렸다. 부부가 휠체어를 탈지도 모른다 했지만 엄마는 ‘새끼들 길러야 되는데 내까지 휠차 못탄다’며 이를 악물고 재활치료를 받았다. 엄마의 왼쪽 무릎은 10도도 안 구부러질거라 했지만 엄마는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리는 한이 있어도 걸을 수 있을만큼 구부러뜨릴거라’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모를 무릎 위에 올라타게 했다. 극도의 고통에도 비명을 지르며 견디고 견뎠고 결국 오른쪽 무릎은 정상에 가깝게, 왼쪽 무릎은 45도 정도까지 굽힐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퇴원할 때, 의사와 물리치료사는 엄마의 투지에 경의를 표했고 엄마는 두 사람에게 감사를 돌려주었다. 주치의는 전국 외과 학회지에 엄마의 기적적인 케이스를 보고했다고도 했다.   

진이가 국민학교 3학년이 되자 진이네는 엄마의 교통사고 합의금으로 집을 사서 외가로부터 독립했다. 외가에서 300미터 정도 떨어진 철길 옆 자그마한 집이 진이네의 첫번째 자가 주택이 되었다. 진이의 집은 마침 진이의 절친 완재의 바로 옆집이었는데 골목 제일 안에는 진해의 조폭 두목 ‘정섭이’의 집도 있었다. 전국 3대 조직이라 할만큼 큰 조직의 두목 ‘정섭이’는 집에 자주 오지 않았지만 그 아들과 딸이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진이와 동갑인 범재였다.

무엇보다 진이가 기뻤던 것은 4025, 그 아이가 사는 해군관사가 진이네 큰 길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2학년말 아버지가 영관급 장교로 진급하자 국민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위관급 아파트에서 영관급 관사로 이사를 갔고 진이는 한동안 등교길에서 그 아이를 보지 못했었다. 관사 단지는 철조망으로 주변이 둘러쳐져 있어서 진이네 길 건너편에 뻗은 철로길을 따라 200미터 정도 떨어진 경비실 입구로만 출입할 수 있었다. 아직 통근 열차가 다니던 때라 등교시간에는 철로를 따라 아무 때나 걸을 수는 없었지만, 7시 40분 통근 열차가 지나가고 난 후에는 철로길을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침마다 그 아이가 나오는 경비실 입구까지 달려갈 수 있었다. 미리 먼 치에 섰다가 그 아이가 경비실 입구를 나올 때, 은근슬쩍 따라나와 그 아이의 뒷꽁무니를 보며 학교까지 함께 가는 건 진이가 아침마다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 되었다.     

“뻐꾹! 뻐꾹! 뻐꾹!”

진이와 옆집 사는 완재는 담벼락 너머로 암호를 정했다. 누구든 먼저하는 세번 뻐꾹은 ‘니 지끔 내랑 놀 수 있나?’였다.

“뻐꾹!”

응답인 한번 뻐꾹은 ‘옴마 없다. 놀 수 있다.’였다.

“뻐꾹뻐꾹!”

붙여서 두번 뻐꾹은 ‘옴마 있다. 바깥에 못 나간다.’였다.

“뻐뻐꾹뻐꾹!”

이 응답은 주로 완재가 진이에게 많이 했는데 ‘매우 응급한 상황이니 빨리 집으로 공부하러 오는 척 해달라’는 뜻이었다. 완재 엄마는 완제가 숙제를 안 해놓았거나 뭔가를 잘못했을 때 예외없이, 주저없이, 곧바로 매를 들고 완재를 타작했는데 진이가 바로 그 타이밍에 맞춰 와주면 진이가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둘이 같이 공부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가주곤 했다. 진이네가 이사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고 진이가 공부를 꽤 잘 하는 편이어서 완재 엄마가 뉴페이스 진이를 ‘예우’해주는 기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완재의 위급 상황 구조요청 신호인 ‘뻐뻐꾹뻐국!’의 참된 의도는 얼마지 않아 곧 탄로 났다. 매를 들 때마다 나타나는 진이의 절묘한 타이밍을 의심한 완재 엄마는 두 꼬마들의 뻐꾸기 암호를 유심히 분석했고 마침내 그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완재 엄마는 ‘오데서 이 쪼꼬만 것들이 잔머리를 굴리노’하며 완재와 진이에게 동시에 매를 휘둘렀고 진이는 재빨리 집으로 도망쳤다.

완재에겐 위로 누나만 셋이 있었는데 누나들은 오랫동안 엄마에게 단련된 터라 각자 알아서 잘 기고 있었으나 막내 아들 완재는 틈만 있으면 엄마의 명령을 어기고 ‘딴 짓’을 했다. 여기서 ‘딴 짓’이라 함은 숙제를 하라는데 축구를 하고, 공부를 하라는데 야구를 하고, 책을 읽으라는데 책을 접어 딱지를 치고, 피아노를 치러가라는데 구슬(그때는 ‘다마’라 했다)이나 팽이를 치는 등등의 모든 엄마 명령 거부 행위였다. ‘딴 짓’을 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진이가 완재의 옆집으로 이사를 오는 순간 둘의 파트너쉽은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둘이 할 수 있는 ‘딴 짓’은 시간이 갈수록 레파토리가 다양해져서 둘이 할 수 있는 모든 운동과 놀이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축구, 야구, 딱지, 다마, 팽이에서 장기, 알까기,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롤러스케이트, 농구까지 끝도 없이 진화해 나갔고 완재에게 금족령이 내려진 날이면(진이네는 원래 금족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이 아빠는 아주 ‘리버럴’하게 자식들을 길렀다.) 각종 ‘딴 짓’을 실내형으로 응용해서 놀았다. 진이와 완재는 마루 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주걱으로 탁구를 치거나 그것도 질리면 아버지의 바둑판을 꺼내 숟가락으로 미니 탁구를 시도했다. 쿠베르탱의 코믹 탁구 묘기를 흉내 내며 킬킬거렸고, 한 녀석이 마루 끝에서 탁구공으로 변화구를 던지면 한 녀석은 30센티 대나무 자를 배트 삼아 탁구공이 뽀개져라 휘둘러댔다. 세 평 마루에 각 귀퉁이를 1,2,3루와 홈으로 정하고 30점이 먼저 날 때까지 넋을 잃고 탁구공 야구를 하다가 완재 엄마가 왈칵 문을 여는 바람에 몽둥이 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다.  

골목 제일 안 집에 사는 범재네는 2층 집이었고 1층 거실에는 롯데 파이오니아 오디오 세트가 있었다. 대형 스피커와 일제 파이오니아 앰프, LP 턴테이블과 카세트 플레이어까지 달린 몇백만원짜리 오디오 세트였다. 집안에서 즐기는 오케스트라 어쩌구하면서 베토벤의 운명 음악에 맞춰 거대한 스피커 우퍼가 꽝꽝 울리는 TV 선전에서 본 그 오디오 세트였다. 그거 몇세트면 진이네 집도 살만한 가격의 오디오 세트에서 나오는 음악의 퀄러티는 진이를 완전히 홀려놓았다. 범재는 노는 친구 그룹이 따로 있어서 진이 완재와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부터 진이는 범재와 자주 어울렸다. 범재네 거실에는 다른 집보다 훨씬 큰 50인치 TV도 있었는데 무슨 메이커인지도 알아볼 수 없는 미제였다. (보통 사람들의 집에 20인치 TV가 그제서야 보급되고 있었을 때였다.) 범재는 팝송을 무척 좋아해서 채널 2번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에서 금요일 밤 방송된 <Saturday night fiver>와 프로그램 중간에 잠시씩 나오는 뮤직 비디오를 소니 비디오로 녹화해서 진이에게 보여주며 침 튀기게 감탄했다. 진이가 중학생이 된 1984년은 마이클 잭슨의 <드릴러>가 나왔고 연이어 <빗잇>과 <빌리진>이 나왔는데 그때부터 범재네 거실은 아예 범재 패거리들의 댄싱홀이 되었다. 물론 진이도 <드릴러>에 나오는 춤추는 좀비 중 하나였다.     

이전 07화 체리엔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