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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Apr 11. 2021

체리엔딩

제 9 장 작은 북

“땡그랑 한 푼~ 땡그랑 두 푼~ 어린이 저금통이 아유 무거워~ 하하하하 우리는 착한 어린이 아껴쓰고 저축하는 살뜰한 어린이.”

진이는 장롱에 붙은 장거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2학년 진해 군항제 독창대회에 나가서 1등을 먹었던 “돼지 저금통”이라는 노래였다. 속에서 뭔가가 부글거릴 때 이 노래를 부르면 속이 시원해졌다.

“아 씨, 나는 키 언제 크노오?”

진이는 큰 방 창문틀에 붙여놓은 키줄자에 다가가 뒤돌아섰다. 오른손을 조심스레 머리 위에 멈춘 후 돌아서서 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였다. 진이의 키는 4학년이 되어도 120센티를 넘지 못했다.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과 훤칠한 키, 엄마의 하얀 피부는 형도가 다 가져가 버렸다. 6학년인 형도의 키는 이미 160을 넘어섰다. 진이는 쌍거풀 없는 얇은 눈과 까무잡잡한 피부, 뭐하나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자신의 외모에 매우 불만이었다. 

“내는 와 아빠를 안 닮고 옴마를 닮았노오?”

진이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피식 웃었다.

“와, 옴마 닮은 기 싫나? 니 옴마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메? 미스 코리아보다 더 이쁘다메?”

“그기 아이고오, 내는 와 키가 안 크냐고오?”

“남자는 크모 다아 큰다. 걱정을 말그라~.”     

답답했다. 같은 주일학교를 1년 넘게 다녔어도 그 아이는 진이의 이름조차 모르는 듯했다. 주일학교 공과 공부시간에 가끔 눈이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 아이는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하기야 누가 쌔까맣고 쪼끄만 자기를 좋아해주겠는가. 그 아이는 이미 140을 넘어 진이는 그 아이를 올려다보아야했다.

완재와 같이 축구라도 할 생각으로 뻐꾹~을 외쳤지만 담너머의 뻐꾸기는 응답하지 않았다. 학교 운동장에 도착해서 빈 골대에 혼자 ‘슈우우웃!’하며 차범근 흉내를 내고 있는데 악기를 하나씩 든 합주부 부원들이 나와 조회대 앞에 줄을 맞추어 서기 시작했다. 진해 군항제 개막 전날에 열리는 전야제에서는 퍼레이드 행사가 있었다. 해군 군악대와 해군 의장대가 앞장서 행진을 하며 멋진 연주와 총돌리기 묘기를 보여주었고 진해여상 관악단과 천도 국민학교 합주부가 항상 그 뒤를 따랐다. 


“군항제 연습하나 보네..”

합주부가 운동장 조회대 앞에 정사각 대형으로 정렬하자 선생님과 함께 그 아이가 나왔다. 진이는 슛을 하려다 헛발질을 했다. 그 아이는 악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반짝이는 알루미늄 지휘봉이었다. 길다란 알루미늄 봉 끝에 동그란 유리 구슬이 달리고 구슬과 봉 사이를 오색의 끈으로 장식한 화려한 지휘봉. 그 아이는 그 지휘봉을 뱅글뱅글 돌리며 입에는 작은 은색 호루라기를 물었다. 진이는 퍼레이드에서 60명이 넘는 합주부의 맨 앞에 서서 지휘봉을 돌리며 행진하다가 ‘삐익 삐익 삑삑삑!’ 호루라기를 불며 다른 손을 번쩍 들어 연주곡의 번호를 지정해주는 여왕 같은 지휘자를 보고 넋이 나갔던 적이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 자리는 명실공히 여왕의 자리여서 보통은 6학년 중에서도 제일 예쁜 누나들이 뽑히는 자리였다. 그런데, 5학년도 아닌 4학년인 그 아이가 그 자리에 발탁돼 지휘봉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얀 백조 깃털을 꽃고  황금빛 실로 전체를 뱅뱅 돌려감아 화려하게 장식한 원형 모자와 아이보리 빛의 제복 원피스에 두꺼운 가죽 허리띠까지, 남색 빵모자에 파란색 와이셔츠, 검은 색 치마와 바지를 입은 일반 합주부원과는 완전히 격이 달랐다. ‘우와~~~’ 진이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저도 합주부를 하고 싶습니다.”

이름이 이상한 강태엽 선생님이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쌔까맣고 쪼끄만 진이가 서있었다.  

“그래? 니 악기 뭐 할 줄 아는데?”

“악기..는 아무꺼또 못 합니다.”

“요오는 합주분데, 악기를 못하모 우짜노?”

망했다. 진이는 말문이 막혔다.

“그,그래도, 합주부, 하고 싶습니다.”

“하이고오.. 그렇나아?”

선생님은 피식, 거절의 웃음을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진이를 돌아보았다.

“근데 혹시 니.. 2학년때 독창대회 나갔던 아아 아이가? 내 그때 심사했는데.”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예. 2학년때 군항제 나가서 1등 했습니다.”

진이는 소리를 질렀다.

“맞다. 내 니 기억난다.. 근데 니 합주부가 그래 하고 싶나아?”

“예에!”

“그라모 보자..”

강선생님은 태엽처럼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악기들이 여기저기 놓인 합주부 교실을 둘러보다가 구석 어딘가에 멈춰 서서 진이를 불렀다.

“니 일로 와서 이거 치바라.”

진이는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작은 북이 하나 놓여있었다. 

“..이거예?”

“응, 니 다른 악기는 못한다메? 그라모 이기 제일 쉬울 걸?”

선생님은 스틱 한쌍을 가져와서 시범을 보여주었다. 진이는 선천적으로 리듬감이 뛰어나서 금방 선생님을 따라했다.

“오오.. 잘 하네. 니 해라, 작은 북. 안 그래도 한 명 뽑을라켔다.”

“진짭니까아?”

“응, 내일부터 6교시 끝나고 일로 와. 군항제 매칠 안 남았으이까 연습 열심히 해야된다~.”

“예, 선생님!”

진이는 기뻐서 날아갈 것 같았다. 선생님께 감사의 배꼽 인사를 올렸다.

“근데, 니 있다아이가.”

“..예?” 

진이가 가려다가 돌아서서 불안하게 선생님을 보았다.

“니한테 북이 너무 안 무겁겠나? 쪼끔더 크고 올래?”

“아입니다! 하나또 안 무겁습니다, 저 힘쎕니다!”

진이는 선생님이 뭔가를 더 얘기하실까봐 얼른 돌아서서 뛰어나왔다. 엄마에게 합주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엄마는 ‘피아노는 맨 날 빼묵고 때리치아드마 웬 합주부?’하며 의아해했다. 그 아이 때문이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진이는 다음날부터 합주부 연습에 참여했다. ‘땃따가닷따 땃따가닷따 땃따가닷따 쿵따따, 땃따가닷따 땃따가닷따 다가다가닷따 쿵따따.’ 선생님은 기본 4분의 4박자 16마디 행진 리듬을 연습시켰다. 일단 그거면 된다 하셨다. 진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몇 시간이고 북을 두들겨댔다. 스틱을 쥔 손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일을 연습하자 옆에 있는 5학년 작은 북 형님과 박자에 맞춰서 북을 칠 수 있게 되었다. 태엽 선생님은 연습 상태를 가끔 보러오셨다. 진이는 자랑스럽게 연습 결과를 들려드렸다. 선생님은 흐뭇한 듯 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북은 정말 무거웠다. 무겁기도 했지만 북은 크고 진이 키는 작아서 북이 바닥에 끌릴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진이가 북을 맨 꼴을 보고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이는 불안한 마음에 북을 가슴팍까지 끌어올렸다. 선생님은 ‘니 그라모 북은 우째 칠래?’하며 우하하 더 웃어재꼈다. 그랬다. 가슴팍에 있는 북은 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행진 연습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 퍼레이드가 일주일 남아서 행진을 하면서 해야하는 여러가지 제식을 익혀야했다. 두줄씩 바꾸기, 세줄씩 바꾸기, 직각 대형에서 원형 대형 만들기, 반으로 갈라졌다 다시 합치기, 기역자로 교차해서 방향 틀기 등 제식은 복잡다단했다. 신참인 진이는 열중에서 길을 잃었다. 헤매는 진이 덕분에 대열은 흐뜨러지고 부원들이 진이와 부딛혀 연주도 엉망이 되었다. 진이는 북을 치기도 힘든데 제식까지 연습하려니까 박자도 못 맞추겠고 숨은 턱에 차고 아주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진이는 이를 악물고 북을 치고 발을 맞추었다. 왜냐면, 눈앞에 그 아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그 아이를 연습 내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진이는 연습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가끔 그 아이가 뒤를 돌아볼 때면 뭔가를 훔친 도둑놈처럼 눈을 피했다. 그 아이는 진이를 알아본 듯 못 본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로 박아!”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꼬로 박는 게 뭐야?’ 여자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눈치 빠른 고학년 남자아이들은 중얼거리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진이는 ‘잉? 이거 뭐지?’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테레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군인들이 기합을 받을 때 주로 하는 자세였다. 머리를 바닥에 박고 다리 둘만으로 지탱하는 고난위도의 얼차려였다. 진이는 형님들의 자세를 보고 땅에 머리를 갖다대었다. 그리고선 다리를 뻗히고 배를 땅에서 떼려하자 머리통에 극심한 통증이 왔다. ‘아!’ 단말마의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느그 지끔 군항제가 몇일 남았다고 정신을 못차리노, 응? 느그 선배님들이 쌓아놓은 명성에 먹칠을 할라고 그라나, 응? 상범이 니 똑바로 안 박나!”

태엽 선생님은 표정이 무섭게 변해서 일장 연설을 했다. 군항제가 몇일 안 남은 건 알겠는데 선배님들이 무슨 명성을 쌓아놓았길래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하는지는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학생이지 군인이 아니지 않은가. 선생님이 길고 긴 연설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낑낑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특히 여학생들은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못해서 옆으로 픽픽 쓰러졌다. 진이는 그 아이가 걱정되었다. 가끔 머리를 바닥에서 들고 그 아이를 흘끔거렸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를 악물고 바닥에 머리를 훌륭하게 잘 박고 있었다. 

“야, 김진! 머리 똑바로 안 박나? 니는 발도 하나 지대로 몬 마추고, 이기 다 니 때무이야, 임마!”

선생님이 기습적으로 진이 탓을 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진이를 쳐다보았다. 모두들 분노에 찬 눈빛이었다. 희생양이 된 진이는 눈물이 날만큼 억울했다. ‘씨, 나는 합주부 들어온 지도 매칠뿌이 안 댔는데 내가 잘 할 수가 있나..’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닌가. 선생님이 너무 밉고 합주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하나 머리를 만져주셨다. ‘선생님이 느그가 미워서 그런 기 아이고 정신 차리라고 그란기다..’하면서 미안하다 하셨다. 아마 치맛바람 쎈 엄마들이 항의를 하거나 합주부를 그만두는 아이들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서 저러는 걸거다 진이는 생각했다. 천도 국민학교의 영관급 장교 마누라 아줌마들의 치맛바람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했다.        


“야, 너 우리 교회 다니지?”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진이는 순간 얼어붙었다. 나한테 말을 걸다니. 그 아이는 진이의 앞으로 와서 진이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진이는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 내 때문에 꼬로 박아서 엄청 썽이 났나보다..’ 생각했다. ‘이렇게 하늘이 무너지다니. 합주부고 머고 다 끝났다..’ 진이는 절망했다.

“나 연희야. 이연희.”

그 아이는 손을 내밀었다. 연희의 하얗고 가는 손. 

“반갑다. 이제 교회도 같이 다니고 합주부도 같이 하네.”

습격이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근데 넌 이름이 뭐야?”

심장 박동수가 급격히 증가해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에 들렸다. 

“으.. 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에선 공기 소리만 나왔다.     

“니 잘못 아니야. 우리가 다 같이 잘못한거지. 그거 얘기해주려고 불렀어.”

“으.. 어..”

“그럼 내일 교회에서 보자.”

그 아이는 쌩긋 한 번 웃고 가버렸다. 진이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 아이가 내게 먼저 말을 걸다니. 내 잘못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잘못한 거라니. 억울하고 우울했던 마음은 깨끗하게 사라지고 갑자기 온 세상이 아름다와 보였다. 하얀 벚꽃잎이 팔랑팔랑 날리고 노오란 개나리가 하늘하늘거리고 빠알간 철쭉꽃이 반짝반짝거렸다. 진이는 집으로 가는 철길을 걷다가 철로 위로 올라섰다. 두 팔을 가로 펼치고 균형을 잡으며 한걸음 한걸음 가다가 이내 속도를 붙여 철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9시에 시작되는 주일학교 예배는 30분 정도면 끝이 났다. 긴 예배의자에는 4학년여, 4학년남 같은 자리 안내표가 붙어있었다. 여학생들이 앞줄, 남학생들은 뒷줄에 자리가 정해져서 진이는 예배시간 동안 바로 앞줄에 앉은 4학년 여학생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배시간에 도착한 순서대로 앉아야 했기 때문에 제일 끄트머리에 연희가 앉아있을 때면 그녀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을 때도 있었다. 진이는 언뜻언뜻 보이는 연희의 뒷모습이나 옆얼굴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오늘은 연희가 바로 앞에 앉아서 뒷통수를 내내 구경했다. 교회에서 보자 해놓고 한번이라도 돌아봐주면 좋을텐데 연희는 친구들과 재잘거릴뿐 한번도 뒤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고 연희는 끝까지 진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뭐야.. 교회에서 보자 해놓고. 진이는 마음이 무지막지 서운했다.     


“양도성~, 이민우~, 박종우~, 성세윤~, 김진~”

주일학교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다. 4학년이 된 이후로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따로 반을 나눠 분반공부를 했다. 학교에서도 남녀 분반을 했는데 주일학교에서도 그랬다. 그 시절은 아직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유교적 영향이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분반공부는 끝나는 시간이 제각각이라 이제 진이가 연희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모든 국민학생이 함께 드리는 예배시간 뿐이었다. 어른들의 대예배가 10시반에 시작되어서 대예배위원이기도 했던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10시 정도까지는 서둘러 분반 공부를 마치고 싶어했다. 


일요일 10시는 하루 일정을 끝내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분반 공부가 끝나면 아이들은 한데 어울려 놀았다. 진이도 아이들과 함께 축구나 테니스를 하러 가곤 했다. 하지만, 연희는 엄한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분반 공부가 끝나는 즉시 집으로 갔다. 하루종일 공부를 해야한다 했다.     

“넌 누구 좋아하냐?”

“으, 응?”

집에 가는 길에 얼마 전 서울에서 전학 온 민우가 대뜸 진이에게 물었다. 진이는 뭔가 들킨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시골에서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걸 말하지도 않았고 들통이 나도 절대 절대 아니라 부정하는 게 예절이었다. 서울놈들은 버릇장머리가 없었다.

“너는 누구 좋아하냐고?”

“아.. 나는..”

“이연희?”

“아, 아니.”

“그럼 누구? 이연희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예쁘잖아?”

“없다. 내는 아무도 안 좋아한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좋아해도 되냐?”

“아니, 안 돼.”

대답을 한 것은 진이가 아니었다. 옆에 있던 세윤이었다.

“연희는 내가 이미 사귀는 중.”

“뭐?”

“내가 이미 연희랑 편지를 주고받고 있지. 하하. 얼마 전에는 손도 잡았어.”

진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이지. 지금 연희 오라해봐?”
 “역시, 양세유~운. 우리 학교에 축구하러 가자.”

“조오치. 진아, 너도 가자.”

세윤이 말했다.

“아.. 나는.. 배가 쫌 아파서.. 집에 가야긋다..”

진이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돌아서서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윤과 민우는 모두 관사 안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연희 아버지와 그들의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 동기이거나 선후배였다. 같은 철조망 안에 사는 아이들이라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반면 진이는 관사 경호실을 통과할 때면 항상 ‘너 어디가냐?’ ‘친구 누구?’ ‘몇동 몇호에 사냐?’ 같은 제지를 받았다. 게다가 세윤이는 키도 크고 잘 생겼다. 그냥 잘 생긴 정도가 아니라 양놈처럼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진하고 콧대가 오똑하고 쌍거풀이 진한 미남이었다. 쪼끄맣고 새까맣고 쌍거풀이 없는 진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해군사관학교 좀 가지. 그래서 우리도 저 관사 안에 좀 살지. 그래서 나도 교회에서 누구 아들이냐 물어보면 당당하게 해사 몇기 누구 아들이다 대답하게 해주지. 해군 자녀도 아닌데 왜 해군교회 다니냐 소리 좀 안 듣게 해주지. 그래서 관사 안에 사는 아이들처럼 서로 집에 불러서 같이 놀게 좀 해주지. 그러다가 에이, 하고 머리를 흔들며 철길 위에 올라서 두 팔로 균형을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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