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동양극장
진해에는 극장이 두 개 있었다.
바닷가 동네답게 하나는 동양극장, 하나는 해양극장. 서울에서 상영된 영화는 한 달 후에나 두 극장 중 한 곳에 들어왔다. 흥행성적이 좋았던 영화를 걸기 위한 두 극장의 유치전은 매우 치열했다. 만약 한 극장이 흥행에 성공한 작품을 사서 걸면 다른 극장은 거기에 초를 치느라 일부러 야한 영화를 걸었다. 동양극장이 '차타레 부인의 사랑'을 걸면 해양극장은 '애마부인'을 거는 식이었다. 서울의 극장에서 이미 수백번을 돌렸던 필름은 진해에 내려오면 누더기 상태였다. 그래서 동양극장과 해양극장에서 트는 영화에서는 항상 비가 내렸다.
천도국민학교는 두 달에 한번 학생들을 영화관으로 보내 단체 관람을 시켰다. 영화는 <세종대왕> <충무공 이순신> <정몽준> 같은 교훈적 사극이 주를 이루었지만 가끔 <로보트 태권브이> <사형도수> <취권>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오락물들도 포함되었다. 그날은 4학년들이 단체로 <세종대왕>을 보러갔던 날이었다. 학생들은 2교시가 끝나고 운동장에 모두 모여서 학급별로 줄을 지어 극장으로 향했다. 2반이었던 진이는 극장 오른 쪽에 앉았다. 극장에서도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과 함께 들어와 번호순서대로 줄을 맞추어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일부러 굵고 근엄한 목소리를 내는 듯한 남자 배우는 신성일이었는지 남궁원이었는지 그랬다. 영화는 뛰어나가서 목을 매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진이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하품이 났다. 하품을 하다못해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화면이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밝아진 어는 순간, 저 멀리 어딘가에 9국에 4025의 옆 모습이 보였다. 진이는 눈이 번쩍 뜨였다. 잠도 금새 달아났다. 순간 멍해져서 반짝거리는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화면이 어두워져 그 아이가 어둠속에 사라져버렸다. '아이씨,' 화면을 다시 보는데 세종대왕이 한 밤중에 촛불을 켜고 앉아서 한글을 창제하고 계셨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낮되라..' 진이는 죄없는 영화를 협박했다. 잠시 후 진이의 말을 들은 듯 화면은 밝아졌다. 동시에 진이의 고개가 그 아이 쪽으로 홱 돌아갔다. 영화가 어두워지고 밝아지는 내내 진이의 고개는 그렇게 좌우 운동을 반복했다.
"니 영화 안 보고 연희만 쳐다봤지?"
영화관에서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완재가 진이에게 물었다.
"머? 아이다."
"니 이연희 좋아하나?"
"아이다케도."
"고마 솔직하게 말해바라."
"...응. 좋아하는 거 같다."
"우하하하. 니 연희 좋아하는구나."
"근데, 완재야. 세유이 있다 아이가."
"누구? 안세윤?"
"응. 세유이가 지끔 연희하고 사귄단다. 세유가 그랬다."
"하, 지랄하고 있네."
"응?"
"이연희는 6학년 김창범이랑 사귀고 있다. 안세유이 그 새끼 뻥까는기다."
"아인데? 손도 잡았고 부르모 바로 온다카든데?"
"머라카노! 이연희하고 손잡고 다니는 아아는 김창범이라니까? 얼마전에 내가 밨다니까!"
"아.. 그랬나아.."
"우끼고 있네!"
진이와 완재가 돌아보니 같은 반 현철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여이는 5학년 행님하고 사긴다."
"누구?"
진이와 완재가 동시에 물었다.
"그 있다아이가. 육상부 100미터 제일 빠른 행님. 정욱진."
"아이다. 6학년 김창범 행님이다."
"어저께 그 가시나가 욱지이 행님 집에서 나오는 거 내가 직접 밨다이까!"
"집에서 나오모 다 사귀는기가?"
진이가 골이 나서 이의를 제기했다.
"아아 섀끼 순진하기는. 다 큰 아아들 둘이서 집에서 단 둘이서 머 했겠노?"
"머, 머 했는데?"
"그거 했겠지."
"그기 먼데?!"
진이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뽀뽀오!!!"
"뽀뽀오오오?!"
진이와 완재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야! 니가 밨나? 둘이 뽀뽀하는 거 니가 밨냐고?!!!"
진이가 열불을 냈다.
"내는 단 둘이 집에 있어스모 그런 거를 안 했겠나 이그지."
"이 저질 같은 섀끼!"
진이는 현철에게 화를 버럭 내고는 냅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니는 임마, 눈치도 없구로.. 진이 지금 이연희 좋아한다 안 카나.."
남겨진 완재가 현철을 타박했다.
"아.. 맞나.. 내일 학교에 소문 내뿌야긋네.."
"이 섀끼가 진짜!"
완재가 현철을 때리려고 손을 들어올리자 현철은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정신없이 집 앞까지 뛰어온 진이는 대문 앞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숨을 골랐다. 붉어진 얼굴엔 땀이 줄줄 흘러내려 눈에까지 땀이 흘러들어가 따끔거렸다. 진이가 옷소매로 연신 땀을 닦아내는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함께 묻어나왔다.
"니 안들어가고 여어서 머하노?"
장을 보고 들어오던 엄마가 진이를 발견하고 말했다.
엄마의 목소리에 진이는 고개를 들었다.
"니 지끔 우나?"
"아이다. 안 운다."
"와? 와 우는데? 누가 때리드나?"
"안 운다니까아!"
"그라모 와 그라는데? 옴마한테 말을 쫌 해바라."
"..세종대왕."
"머?"
"세종대왕 때문이다."
"세종대왕이 와?"
"세종대왕이, 에이씨! 재미 억수로 없었다고오!"
진이는 벌떡 일어나 대문을 발로 쾅, 차고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