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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을 사랑한 아티스트

by 매실 Sep 19. 2024

 잔나비 콘서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공연이 끝나면 한 사람씩 하이파이브해 주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하이파이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팬이 많아졌다. 성장 과정을 지켜봐서 그런지, 잠실실내체육관까지 온 사실이 너무 뿌듯하다. (물론 아직 더 큰 공연장으로 가야 하지만) 단순히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잘 돼서 뿌듯한 건 아니다. 밴드 정체성이 모호하던 시절에서 밴드 정체성이 명확해진 지금까지의 단계를 잘 밟아온 아티스트가 잘됐기 때문에 기쁘다.

 팬이 많아진 만큼 공연장도 커졌다. 하지만 티켓팅은 여전히 힘들었다. '말이 안 되잖아. 공연장이 커졌으면 티켓팅은 쉬워야지. 왜 티켓 한 장 구하기 어려운 건데'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티켓 사이트를 새로고침했고, 잠깐 스쳐 지나간 포도알을 보면서 마우스 클릭이 느린 내 손을 째려봤다. "안돼. 이럴 시간이 없어" 다시 새로고침을 시작했다.


포도알 있었는데, 없습니다.
이선좌 씨 우리 그만 봅시다!


 팬카페에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티켓팅 실패에 우울했고, 취케팅 성공에 기뻐했다. 그렇게 매일 취케팅을 노린 결과, 3층 자리를 얻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콘서트 당일. 3층이 생각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사람이 이쑤시개보다 작을 수 있구나.' 더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봤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렴 어때! 지금 난 공연장에 있는데. 얼굴이 안 보여서 전광판을 봐야 했지만, 공연 콘셉트부터 연출, 편곡까지 완벽한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의 깊이와 표현력이 좋아지는 건 음악을 대하는 진심 때문인 것 같다.


 덕분에 공연 중간중간 울컥한 순간이 많았다. 첫 등장부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달까. 스스로도 시작부터 유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이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 음악에 '시절'이 따라와서 그런 게 아닐까. 나이가 비슷하다 보니 고민하는 지점이 비슷하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 당시의 내가 생각난다. 애틋했던 내가. 아티스트랑 우리가 하는 고민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각자의 사연이 다를 뿐 불안, 행복, 걱정 등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만 아티스트는 우리보다 그 감정을 더 깊게 들여다보기 때문에 우리가 작품을 보며 위로받는 게 아닐까.


 내가 여전히 울컥한 건 아직도 내 감정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제대로 어루만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애틋하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상태랄까.


답을 쫓아왔는데
질문을 두고 온 거야.
돌아서던 길목이었어

이봐 젊은 친구야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린 그 자리에
가끔 뒤 돌아보면은
슬픔 아는 빛으로 피어


 그런 의미에서 잔나비를 질투한 적이 있었다. 표현력에 질투했고 음악의 진심에도 질투했다. 제자리걸음하는 나와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참 없는 내 청춘이 쓸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잔나비 가사를 봤을 때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부러움에 우울했고, 성장하는 그들과 달리 뒤처지고 있는 내 모습이 짠하기도 했다. 잔나비는 지나온 슬픔에게 인사할 여유가 생긴 듯한데, 난 여전히 그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질투에서 고마움으로 바뀐 건 나아갈 수 있게 옆에 있어주겠다는 가사 덕분이었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네가 가고 싶다면 '기꺼이 함께 가주지', 먼 훗날 돌아가자고 해도 웃으면서 함께 가줄 것 같다는 마음. 너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지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그래 넌 두 눈으로 꼭 봐야만 믿잖아
기꺼이 함께 가주지


 같은 곡을 부르지만, 늘 새롭다. 어떻게 하면 같은 음악도 새롭게 받아들일지 고민한 덕분인 듯하다. 같은 곡을 수백 번 연습한다면, 질릴 수도 있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음악을 더 사랑하는 게 보였다. 그 시절을 사랑한달까. 그렇기에 점차 나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음악을 따라 부를 때마다 가사를 읊을 수밖에 없어서 그 마음과 오버랩되는 듯했다. 분명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지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 감정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모습에서 좋은 에너지를 전달받는다.


 공연 중에 곡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에피소드처럼 들려줬다. 그중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는 단언컨대 레전드였다. 잔나비 보컬 최정훈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쉽게 따라 부르기 쉬울지 잔나비 기타리스트 김도형에게 고민을 털어놨고, 도형이가 자신이 찾은 음악을 들려주면서 자연스럽게 정훈이가 노래를 불렀고, 키보드, 드럼, 베이스 등 각종 음악으로 이어진 뒤 팬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과정까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팬들 덕분이라고 말하는 듯한 연출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중간에 양희은 가수의 봉우리를 불렀다가 잔나비의 외딴섬 로맨틱으로 이어 불렀다. 내가 오를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일 수 있지만, 함께 가주겠다는 말. 가장 필요한 순간, 정말 필요한 말을 해줬던 아티스트. 한 권의 책을 읽은 듯 마음이 든든하고 벅차고 힘찼다. 앞으로 잔나비가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된다. 나도 그간 피해기만 했던 내 감정과 제대로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가능할 것 같은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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