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늘 막내입니다> 1부
좋은 제안이 여러 번 들어왔지만, 이유 없이 펑크 나기 일쑤였다. 한없이 좋았다가 한없이 기분이 다운됐다. 막연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예전에는 기다림 속 설렘을 좋아했지만, 기다림에 설렘과 불안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버린 뒤로 기다리는 일이 마냥 좋지 않았다. 그때 서점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서점 공부와 콘셉트 및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 제안을 했던 대표는 미팅 날짜를 계속 미뤘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진행 여부를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생각했던 기한보다 많이 미뤄지는 것 같아서 경제적인 사정을 말했다. 역시 명확한 답변 없이 기다려달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결국 월세 내기 위해 적금을 깼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표는 연락이 없다. 연세가 있으셨고 인천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셨던 분이라 신뢰했다. 난 친구들 말처럼 사기당하기 좋은 사람인가 보다. 사람을 믿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대표에게 왜 날짜를 미루는지 물어봤다. 결정된 게 없어서 만나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행 여부나 미팅 날짜를 물어보면 이번 주에 만나자, 문자로 하기보다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했었는데. 불편한 말들이 오가는 걸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같이 사는 친구도 이제는 집을 나가게 되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결국 그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불안한 한 달이 지나자 다행히 여행 에디터를 요청하는 기업이 있었고, 경력이 많지 않아서 일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던 크몽에서도 연락이 왔다. 친구도 이직에 성공하여 계속 살기로 했다. 풀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둘 풀려갔다. 이 기운을 믿고 다시 한번 답답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기로 했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인가. 너무 막막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너무 막막해서 당장 해야 할 일을 찾기도 했다. 어떻게든 살고 있고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백수가 되니 안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쁜데 여유로웠고 시간은 없는데 시간이 많았다. 선풍기를 회전으로 틀어놓고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니 바람이 가을바람처럼 시원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블루투스 스피커에 좋아하는 음악이 들리니 이 시간이 너무 여유로웠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리다 보면 3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뭐 먹고살지 고민해야 하는데 배가 고파서 뭐 먹을지 고민으로 이어졌다. 어제 엄마가 담가준 김치가 있으니 참치 넣고 김치찌개나 끓여야겠다. 쌀을 씻고 쌀뜨물을 따로 담아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방안에 온통 얼큰한 김치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식사를 마친 뒤 사과를 깎아 먹고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에서 산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 했다. 그 커피를 마시며 여행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이처럼 아침엔 알람 없이 느지막이 일어나고 좋아하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먹고 싶은 음식은 직접 요리하면서 지내고 있다. 덕분에 회사 다닐 때 저녁으로 먹었던 인스턴트 음식은 멀리하게 됐다. 중간에 내려놓지 않고 꾸준히 글 쓴 덕에 프리랜서로 지금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없어서 목표 없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목표 있는 글을 쓰고 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오늘 이 일로 커피 한 잔과 든든한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다. 왜 그렇게 일을 하려고 애를 썼을까? 왜 일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불안해했을까? 일하지 않은 몇 개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직할 땐 몇 개월의 생활비는 있어야 어느 정도 덜 불안해하면서 새로운 일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릉이를 빌려서 샛강다리에서 자전거 타기도 했다. 걷고 뛰는 사람만큼이나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다. 아쉬운 하루를 그냥 보내지 않은 이 사람들 속에서 나도 건강한 하루를 보내려 했다. 저녁 무렵, 우연히 일몰을 볼 때도 있다. 그런 날엔 벤치에 앉아 온 동네가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멍하게 보기만 했다. 매일 생각해야 하는 일 속에서 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는 것이 이렇게 평온하다는 걸 새삼 알게 됐다. 일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순간을 요새 많이 느끼고 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 던 때와 달리, 침대에서 책을 읽으면서. 세탁기를 돌리고 물에 젖은 옷을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널으니 다우니 냄새가 방안을 차지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낮잠을 잤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하루들이 쌓이고 있다.
일은 해야 한다. 핸드폰, 교통비, 월세, 각종 공과금까지 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걸 내기 위해 일을 악착같이 하고 싶진 않다. 딱 먹고 살 정도만 벌고 그만큼만 일하면서 나머지는 내가 좋아하는 시간들로 채우고 싶다. 여유로움 속의 행복을 이제야 알았다. 이런 여유로움 속에서도 가끔 불안이 찾아온다. 다들 승진하면서 많은 월급을 받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선택이었다. 난 딱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기로 했으니까. 돈이 부족하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글 관련해서 여러 공모전을 나가면서 내 글을 좋아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은 반복되겠지. 실망이 크면 하루 종일 우울하게 보낼 거고, 기대가 큰 날이면 하루 종일 들떠있을 거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많은 일을 했다. 쉰 적이 없어서 잠깐이라도 쉬는 날엔 불안했고 뭐라도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서곤 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 불안을 선풍기와 블루투스 스피커 덕분에 잘 이겨내고 있다. 앞으로도 70년은 일해야 할지 모르니까. 일하는 삶은 이제 시작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잠깐의 휴식은 즐겨도 된다. 그래도 다양한 일을 해본 덕분에 일에 대한 가치관이 생겼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도 선명해졌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 이런 휴식도 필요하다. 덕분에 놓쳤던 행복을 가까이 두게 되었으니. 다음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요즘은 설레는 감정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