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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상가 May 10. 2016

체크리스트

나를 살린 체크리스트

내가 다니는 병원은 마포의 한 정신과이다.

누가 봐도 소아정신과에 가까운 곳이었다. 내가 그런 곳을 다니게 된 이유는 단지 내가 살고 있던 고시텔과 가장 가까운 정신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뜻밖의 곳에서 나는 생명의 은인을 만났다.

그 시절 나는 좁디 좁은 고시텔에서 나는 방송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점점 나를 좀먹고 있었다. 몸은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장선생님과 상담선생님 모두 실력이 출중하신 분들이셨다. 그런데 나의 몸상태는 도통 좋아질 기색이 없었다.  하라는대로 했지만 전혀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나는 불현듯 내가 정말 미쳐서 신병이라도 든건 아닐까. 난 정말 세상에서 구제받을 수 없는 또라이인건 아닐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공황장애는 점점 사라졌지만 우울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불면과 삶에 대한 불만족. 이유모를 자기혐오. 스스로에 대한 낮은 자존감은 늘 나를 괴롭혔다.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성폭행도, 국가적인 재난을 겪은 적도 없었다. 사고를 겪은 적도 없었다. 어린시절 겪었던 사소한 상처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나에 대해 생각할수록 괴로워만 질 뿐이었다.


그날도 지쳐 병원 카운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내 시야에 ADHD 체크리스트 라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리에서 체크를 했고 전부 내 얘기인 것만 같았다. 그 종이를 원장님께 드렸다.

"있길래 체크해봤어요."

"잘하셨어요."

선생님은 내 체크리스트를 받아들이시곤 잠시뒤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역시 OO씨는 ADHD는 아니에요."

"그렇죠? 하하. 신기해서 해봤어요."

그도 나도 웃었다. 가려던 찰나

"이번엔 약을 좀 바꿔볼게요."

"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그저 약이었다. 난 약을 자주 바꾸었었다. 이약 저약. 평범한 늘 지겹도록 먹는 알약. 그런데 다음날, 나는 달라졌다.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물론 ADHD가 꼭 약물을 먹는다고 해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진 않는다. 약물에 따라 사람들이 겪는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일단 병원을 갔다.


"선생님 저 이제 살 것 같아요. 갑자기 제정신이 된 것 같아요. 진짜 내가 된것 같아요. 그게 무슨 약이에요?"

"사실은 ADHD약물입니다."


왜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약물을 처방했냐 놀랄수도 있다. 간혹 환자에게 말하지 않고 의사의 선택으로 약물을 처방한뒤 향후 결과를 보는 진단법이 있다고 한다. 내가 그 케이스였다.

나는 충격도 분노도 후회도 없었다. 많은 ADHD환자들은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다고 한다.

개운함과 이해 그리고 이제껏 그것도 모르고 스스로를 게으르고 나약하다고 탓했다는 억울함.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되던 순간이었다.

국어부진아가 작가를 하게 된것도, 성적이 상위권과 하위권을 번갈아가던 것도.

나는 바보가 아니였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또라이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다. 그저 단 하나의 사람.

병원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그간 버텨왔던 내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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