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공휴일이 많은 연말에 맞춰 대구에서 친정 엄마가 오셨다. 연휴가 끝난 뒤 엄마는 아침에 대구로 다시 돌아갔다. 출근해야 하는 나는 시내버스 터미널행 버스가 서는 정류장까지 엄마를 차로 태워다 드렸다. 엄마한테 눈 마주치며 살갑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바삐 회사로 향했다. 엄마가 타야 할 버스는 15분 뒤에나 도착할 예정. 추운 날씨에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기다릴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런 날에는 회사에 연차나 반차 휴가를 내고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드리면 좋았을 텐데, 하필 다음 날이 우리 집 막둥이의 어린이집 방학이라 이미 연차휴가를 내놓은 상황이었다. 그냥 오늘 하루만 회사에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라고 말할 걸 그랬나.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온다.
엄마가 버스를 잘 탔나 싶어서 전화를 했다. 잘 가고 있단다. 엄마가 전화를 끊으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 "엄마는 명색이 내 용돈을 주시고 싶으셨는지 나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몰래 돈을 두고 가셨다."
ⓒ flickr
"은영아. 네 차 뒷좌석에 오만 원 놓고 왔다. 너한테 주면 네가 안 받을 것 같아서 내릴 때 몰래 놓고 왔어. 맛있는 거 사 먹어. 엄마, 잘 놀다 간다."
엄마는 9살, 4살 손자들에게도 크리스마스라며 용돈 오만 원씩 각자 손에 쥐어주셨다. 사실 애들 용돈은 내 지갑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 용돈을 주시고 싶으셨는지 나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몰래 돈을 두고 가셨다. 직접 주면 딸이 안 받을 걸 뻔히 알아서 뒷좌석에 덩그러니 놓고 가셨다. 직장 다니며 월급 받는 큰 딸에게 무슨 용돈을 주고 싶으셨을까. 마음이 저려왔다.
엄마한테 효도한다던 딸은 어디로 갔나
지난달 친정에 갔을 때 잠옷 바지를 욕실에 두고 왔다. 엄마는 보풀이 덕지덕지 피어난 바지를 보고 안쓰러웠는지 이번에 오실 때 정장 바지 두 개를 사 오셨다. 정장 바지를 잠옷 바지처럼 입고 잘 수 없는데 말이다. 그냥 막 입는 잠옷이었는데, 그 옷을 본 엄마는 마음이 편치 않았나 보다.
딸만 둘인 집안의 장녀라 매번 무뚝뚝한 큰 아들처럼 정 없게 굴고, 못된 말하고 대하기 어려운 딸처럼 굴어왔다. 어릴 때는 '이다음에 크면 엄마에게 효도해야지' 하고 다짐해놓고는, 막상 두 아들의 엄마가 되자 '친정엄마의 삶은 같은 여자로서 보기에 답답하다, 자신의 삶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평가를 속으로 하곤 했다. "엄마한테 효도해야지"라고 다짐했던 착한 딸은 "엄마처럼은 안 살 거야"라고 말하는 못된 딸이 되었다.
얼마 전 KBS 2 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고백 부부>를 보면서 나는 목이 잠길 정도로 펑펑 울었다. 이혼한 남편과 함께 10년 전으로 거슬러 돌아간 여자 주인공(장나라)은 임종도 못 지키고 떠나보낸 친정 엄마와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극 중 여자 주인공이 딸만 둘인 집안에서 자란 게 나와 똑같았고, 극 중 친정 엄마의 모습도 우리 엄마와 닮아서 더 몰입하며 봤다. 드라마 한 편 한 편이 너무나도 와 닿았다.
극 중에서 막내딸인 여자 주인공이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는 언니에게 충고하는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엄마가 쭉 우리 옆에 있을 것 같아? 없어. 너랑 내 인생에 손수 껍질까지 다 까서 주스 갈아 줄 사람, 아침 챙겨줄 사람. 엄마 없으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남편이 해줄 것 같아? 자식이?"
그동안은 엄마가 해주는 모든 것들을 감사하게 받지 않았다. 쓸데없는 돈 쓴다며 엄마에게 되레 잔소리한 적도 많았다. 엄마가 주는 사랑을 고스란히 예쁘게 받지 못했던 나였다. 어쩌면 엄마의 사랑을 매번 당연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감사할 줄 모르고, 고마운 줄 모르고, 엄마의 사랑이 모두 당연한 것이라 여겨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도 자식을 키우고 있다. 지금 내가 아이들을 키우듯, 우리 엄마 역시 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왔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사랑은 서로 닮아가는 것
▲ KBS 드라마 <고백 부부>의 한 장면 ⓒ KBS
<고백 부부>를 본 뒤로는 엄마에게 말도 조금 더 살갑게 하고, 엄마라는 이유로 쉽게 툴툴거리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영원한 건 없기에, 지금 엄마가 정정하실 때 더 잘 해드리고, 감사히 받고,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에 정장 바지를 사 오신 엄마에게 '고맙다, 잘 입겠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옷이다, 내일 출근할 때 입고 가야겠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엄마의 사랑이, 엄마의 헌신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 싶고,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었을 테니까.
거실에서 KBS 1TV <6시 내 고향>을 보던 엄마의 등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엄마 어깨를 주물러 주고 싶었다. 내가 친정 엄마의 어깨를 주무르는 사이, 두 아들 녀석도 내 어깨를 주무르겠다며 붙었다.
내 뒤에는 큰 아들 엽이가, 큰 아들 뒤에는 둘째 아들 민이가, 그리고 그 뒤에는 남편이 줄지어 앉아 서로의 어깨를 안마해주기 시작했다. 내가 친정 엄마한테 하는 모습 그대로, 우리 아이들도 덩달아 함께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랑은 보이는 그대로 흘러가고, 서로 닮아 가나 보다.
보풀 핀 딸의 잠옷이 마음에 걸려 예쁜 정장 바지를 사 오시고, 다 큰 딸에게 용돈을 주고 싶은데 안 받을 것 같아 몰래 놓고 가고, 자식의 인생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도 내놓으시는 우리 엄마.
엄마처럼은 못 산다던 나는 과연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우리 엄마의 반의반이라도 닮았을까?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삶이 답답하게만 보였는데 이제는 다르다. 그냥 엄마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엄마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위안이자 안식처가 된다.
누가 있을까? 나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는 사람이... 아마 엄마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