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둘이 부부라면?
프롤로그
2012년 봄, 첫 디자인 전공 수업 때였다. 복학한 지 2주밖에 안된 청년은 생전 처음 본 한 여자 사람에게 대뜸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놀랐지만, 싫지는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처음엔 서로 비슷한 점만 눈에 보였던 것 같다. 서로 다른 배경과 환경에서 자란 우리가 어쩜 그렇게 잘 맞을까 신기했다. 콩깍지 때문이었을까, 연애하고 2년 동안은 싸울 일이 없었다.
우린 함께 전공 수업을 듣고, 디자이너의 꿈을 꾸고, 학관에서 같이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매일 밤하늘을 보면서 함께 다짐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자고.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고. 실은 현실성 없는 객쩍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지만, 우린 그게 즐거웠다. 그렇게 각자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되었고, 생생하게 꿈꾸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누군가의 희망찬 공식에 위로를 받았다. (R=VD, Realisation= Vividly Dream)
지나고 보니 꽤나 낭만적으로 들리는 그때의 우리는 많이 헤매고 부딪히고 깨지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었고, 나는 자동차를 좋아하는 UX 디자인 학도였다. 매일 밥을 먹을 때나 산책을 할 때에 우리의 관심사에 대해 나누고 발전시키다 보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함께 졸업 프로젝트를 하면 어떨까'로 이어졌다. 그렇게 우린 2016년 졸업 전시를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하지만 금세 서로의 다름에 부딪혔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른 정반대의 디자이너였다.
흔히들 자동차 디자인은 '산업 디자인의 꽃'이라고 한다. 수많은 디자인 학생들이 도전하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만큼 세계적으로 경쟁률이 높다. 처음 그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정말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가 A3 종이에 바퀴 4개를 그리는 연습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9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와 함께 했다.
그는 영국에서 석사를 공부하면서 독일 볼프스부르크와 런던에서 두 번의 디자인 인턴을 거쳤고, 작년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비록 영혼을 갈아 넣어 준비한 졸업 전시가 코로나로 인해 취소되고 그마저도 온라인으로 대체되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올해부터 유럽 자동차 회사에서 신입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프로 디자이너로 이제야 '시작'하는 단계라 앞으로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그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된지는 이미 오래였기 때문에,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도 참 크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조형의 아름다움을 자동차 디자인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은 스케치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어떤 컨셉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디자인의 디테일까지도 고민했는지, 3D 모델링으로 입체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등 수많은 요소들 역시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동차라는 오브제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새로운 디자인을 찾으려고 부단히 도전한다. 어찌 보면 너무나 추상적이지만 그만큼 감성적이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들이 모여있는 집단이고, 업계에서도 이를 요구한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도 뒤돌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들의 목표이다.
‘사용자 경험 디자인’의 줄임말로 불리는 UX 디자인은 최근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에 가장 많은 디자이너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분야다. 아주 넓은 의미로는 사람이 어떠한 제품을 사용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인터렉션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디지털 인터렉션을 담당한다.
UX 디자이너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왜 사용자들이 불편함을 느낄까, 그들을 최종적인 목표까지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겉으로 보이는 표면적인 디자인뿐만 아니라 이 비즈니스의 프로세스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등 수많은 질문들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을 해결하기 위한 디자인 안을 제안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디자이너다.
(UX 디자이너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아래 매거진에 연재하고 있다.)
https://brunch.co.kr/magazine/uxinfinance
나 역시 그런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매일 일하고 공부하고 적용하는 중이다. 런던에서 3년 반 동안 일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계속 UX 디자이너를 하고 싶다. 이 직업의 많은 매력 중 하나는 회사의 업종에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나처럼 금융업계에서 일하다가 맥킨지, 딜로이트와 같은 컨설팅으로 갈 수도 있고, 카카오톡, 구글과 같은 IT 회사로 이직할 수도 있다. 이런 직업의 특성은 나를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디자이너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렇게 정반대의 특성을 가진 디자인을 하는 우리는 서로의 디자인에 참 많은 질문을 던져왔다.
스케치를 시작하기 전에 더 많은 리서치를 해보는 건 어때?
이 디자인은 사용자한테 어떤 의미가 있어?
최종 디자인을 결정하기 전에 더 다양하고 새로운 디자인 연구를 해보는 건 어때?
말로 설명하기 전에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아?
물론 이렇게 예쁜 말로만 질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날 선 말투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질문들이 서로를 성장시킨다. 각자가 가지고 있지 않는 시선이기 때문에 서로의 의견이 더 흥미롭기도 하다.
우리는 '디자이너 부부'이다. 둘 다 디자인을 하니 서로 더 많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서로의 디자인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공감한다. 하지만 더 많이 아는 만큼 더 많이 보인다. 서로의 약점까지도.
그리고 누구보다 더 도움이 되려고 건넨 피드백은 서로에게 가장 아픈 화살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상대방에게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니. 이런 이유로 언젠가부터 상대방에게 디자인 피드백을 주기가 더 조심스러웠다. 누구보다 더 자세히 나의 성장 과정을 알고, 어떤 점들이 부족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오히려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은 참 역설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수많은 객쩍은 꿈들이 있다. 비록 유럽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여러 회사원 디자이너들 중 둘일 뿐이지만, 뭐 하나 특별할 것 없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다. 부부로서 디자이너로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던 대학 시절의 약속이 최근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로 에세이를 써보려 한다. 그리고 더 이해해보려고 한다.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