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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b급 잡설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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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원 Oct 02. 2023

뭐든 반려는 싫다

반려자라는 말에서 심정적으로 뛰쳐나온 지 오래 되었다.  사전에는 '짝 반 伴과 짝 려 侶를 써서 반려라고 하며 뜻 자체는 '인생을 함께 하는 자신의 반쪽 짝' 으로 결혼 상대방을 지칭하는 단어였다가 동물단체가 애완동물을 대체하는 명칭으로 반려동물을 주창하면서 의미가 확장되었다.' 고 나와있다. 이혼률이 높고 혼자 사는 가구가 늘어나니 퇴색한 반려자 대신에 반려견, 반려묘, 반려식물이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도서관으로 가는 길 위에서 반려견을 풀어놓고 당당히 앞장서서 가는 견모를 보았다. 개줄을 왜 잡지 않고 가는지. 나는 견모를 보았지만 그 여자는 의미 모를 미소만 지었다. 봐달라는 거야? 뭐야.  오늘 아침에만도 도보로 20분 가는 도중에 커다란 개 한 마리, 작은 개 한 마리를 보았고 그들의 보호자도 덩달아 두 명 본 셈이다. 나는 그들을 피해 인도가 아닌 도로로 내려가서 걸었다. 그들의 개는 가로수 아래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었다. 그 냄새가 내 쪽으로 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자동차 매연이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외로움의 몸부림을 본다.  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사랑하는 자신을 좀 봐달라, 온정적이고 평화적이고 박애적인 나를 봐달라 하는 신호로 읽혀진다. 언젠가 공원에서 여러 마리의 개를 끌고 오는 남자가 내 옆으로 다가와 그 개들이 내 신발을 핥으려고 하자 내가 일어서며 소리쳤다. '개를 싫어해서요.' 그러자 그 남자왈, 한번 극복해 보시지요. 하였다. 극복이라니. 개를 키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 외로움과 존재감 없음이라는 증상, 어쩌면 외산 스포츠카나 명품백과도 같은 사치재 같은 반려 중독증을 극복해 보시는게 맞지 않나, 하고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나는 그 남자에게 '당신은 외로움을 좀 극복해 보시지 그래요?' 하는 대거리를 그 때 왜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되었다. 


언젠가 견모인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경멸해.' 친구는 설마 나에게 이런 말을 할까 하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고 개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가엾게 보았다.  

나는 친구와 산책하는 것은 좋지만 개를 데리고 나와 그것도 목줄을 풀어주는 친구와의 산책은 싫다.  그러니까 나는 개도 개 이지만 개주인이 더 싫다. 개를 액세서리처럼 사치재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과는 교류하고 싶지 않다. 


반려라니, 사람에 대한 쌍방향의 공감을 단련하려는 노력없이 그저 일방향의 희생과 헌신과 충성을 낭만적으로다가 동거하는 자들의 대책없는 외로움과 허영심, '내 개는, -내 아이는- 절대 사람을 물지 않아요.' 하는 어이없는 신념이 불편하다. 무엇보다 본인만 좋으면 다인줄 아는 이기적이고 게으른 집사들에게 끌려나와 힘들어하는 무수히 많은 반려견의 슬픈 눈동자를 보는 것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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