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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설장 10화

백설장 10

-잠과 섹스 중

by 이도원

섹스 후의 나른한 잠 속으로 남자가 빠져 들어가면 여자는 남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으로 손가락을 넣거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대기도 했다. 여자의 눈빛은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듯 보였다. 그러나 남자가 잠에서 깨어나면 이내 손을 거두고 자신도 자다가 이제 막 깬 척 연기했다.

여자는 자고 있는 척하는 것이 분명하다. 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남자는 망설이듯 손을 뻗어 여자의 푸른 블라우스 단추를 끄른다. 이 블라우스는 지난번에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준 선물은 참으로 많았다. 향수와 옷, 그리고 화장품, 핸드백, 구두. 하지만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는 여자의 표정은 본 적은 없었다. 이내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이 드러난다.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젖무덤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두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넣은 뒤 그것을 가볍게 비튼다. 여자의 젖꼭지는 단번에 단단해진다.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자는 쾌감에 결국 더 이상 연기를 하지 못하고 남자의 목을 끌어안는다.

여자는 조금 전 나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이 남자에게 아직도 애정이 남아있는지는 내 몸이 판단할 거야. 애정이 사라졌다면 내 몸은 뜨거워지지 않겠지. 그래. 내 몸이 말해줄 거야.”

여자는 허영과 사치를 아무 죄의식 없이 맘껏 누리는 남자, 그렇지 못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 한 조각 없이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남자를 경멸하지만 그것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도록 하는 요건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제 여자는 남자의 몸 위에서 뒤로 완전히 허리가 꺾인 채 희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 뒤엔 꼭 싸움이 일어났다. 남자가 잠에 빠져들려고 하면 여자는 슬슬 남자에게 싸움을 걸곤 하는 것이다.

“또 자려고 그래? 그럴 거면 지금 나가. 나가서 맛있는 거 사줘.”

“피곤해서 그래. 잠시만 눈 좀 붙일게.”

“뭐 한 게 있다고 피곤하다고 하는 거야? 피곤한 건 나지 안 그래?”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 빙긋이 웃는다. 여자는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에 발끈한다.

“뭐야? 그 표정은? 내 말이 틀렸다는 거야?”

“왜 이렇게 짜증을 내는 거야?”

여자는 남자의 여유 있는 웃음에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으로 옷을 입기 시작한다.

“나, 갈래.”

“왜 이래 정말?”

“아님 혼자 있다가 나오던지. 나는 나갈 거야.”

“오늘 내가 선물을 준비하지 않아서 그런가?”

여자가 화가 난 듯 날카롭게 말한다.

“선물보다는 돈이 좋아. 돈을 준다면 여기 더 있겠어.”

남자는 여자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본다. 여자가 다시 말한다.

“당신에겐 돈이 넘치니까 풍족할 만큼 나에게 돈을 줘. 그래야 손해 보는 느낌이 없겠어.”

남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둔 바지에서 지갑을 꺼내온다. 그리고는 황금빛 카드를 꺼낸다.

“자, 마음대로 써봐. 이제 옆으로 와서 내가 잠을 잘 수 있도록 해줘.”

여자는 남자가 건네준 카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이제 이리로 와서 나를 잠들게 해 줘. 나는 잠이 필요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돈을 지키느라고.”

남자가 호쾌하게 웃는다.

“돈은 그냥 있는 거야. 지킬 필요도 없어.”

여자는 카드를 꼭 쥔 채 남자의 옆에 가 눕는다. 남자는 여자의 젖가슴에 손을 넣는다.

“이 카드한도액만큼만 만져. 더 이상은 안 돼.”

여자의 말에 남자가 또 큰소리로 웃는다. 여자는 남자가 웃을 때마다 심장에 탄환이 꽂히는 듯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어 여자의 그런 참혹한 표정을 보지 못한다.

“분명히 말해둘 게 있어. 나는 당신이라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한 남자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이 카드의 감촉이 그걸 말해주고 있어. 이 매끄럽고 서늘한 감촉.”

“모두들 그렇지. 돈을 경멸하는 사람을 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당신은 불행할지도 몰라. 이렇게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니까.”

남자가 여자의 이 말에 눈을 뜬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든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있는 이유는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돈 때문이지.”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네 말대로라면 난 불행조차도 구매할 능력이 있다는 말이니까. 이제 그만 입 좀 다물지. 대신 그 매끈한 카드를 껴안고 뭘 살까 행복한 고민이나 하는 게 어때?”

여자는 말한다.

“그럼 난 정말 매춘부가 되는 셈이네. 섹스를 하고 신용카드를 받으니까.”

“정말 피곤하게 만드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날 보고 어쩌라고?”

“왜 당신은 고통스럽지가 않은 거지? 왜 슬픔이란 게 없는 거야?”

“지금 난 충분히 고통스러워. 잠을 자지 못해서 말이지.”

갑자기 여자가 카드를 남자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이걸 껴안고 잠을 잘 사람은 당신인 것 같군. 난 가겠어.”

“왜 이래? 그래 안 잘게. 그러니까 여기 옆으로 와. 그냥 있어 줘.”

“여기 주인에게 여자를 하나 들여 달라고 할게. 나는 갈래.”

남자의 얼굴이 화난 표정으로 변했다.

“필요 없어. 나도 나갈 거니까.”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쉰다. 남자가 말한다.

“돈이 많은 것도 죄가 되는군. 당신은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특이한 사람이야. 그래서 싫증이 나지 않았지. 근데 때로 그 황당한 피해의식은 나로 하여금 피로하게 만들어… 당신 말대로 부자는 모두 피곤이 누적된 환자일 지도 몰라. 그걸 좀 봐주면 안 될까?”

남자가 옷을 입는다. 그리고는 시계를 손목에 찬다. 그리고는‘자, 이제 나가지?’하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어렵게 살지 말자. 나는 당신과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이곳에 와서 잠을 자고 싶어. 당신처럼 정직한 여자가 옆에 있으면 나는 잠이 잘 와. 당신 말이 맞아. 나는 돈을 무시하는 사람 옆에서만 잠이 와. 내가 아내와 나란히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잖아? 나는 아내와 섹스는 할 수 있어도 숙면은 할 수가 없어. 아내는 돈 밖에 모르지. 아내는 내가 돈을 주지 않는다면 나와 나란히 마시는 공기도 아까워할 걸 … 난 … 당신이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 한 달에 한 번, 당신과 그저 아무 행위도 없이 잠만 자고 싶어. 오래전 엄마의 자궁 속에 있었던 그 느낌이 당신에게만 드니까.”

여자는 좀 전의 씩씩하고 호기롭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이젠 남자보다 더욱 쓸쓸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

“당신은 숙면을 취할 수 있다지만 나는 오히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내 남편이 생각나기 때문이야. 돈 많은 당신으로 인해 돈이 없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일어나. 이제 난 … 남편에게로 돌아가야겠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배반당할 이유는 없어. 이제야 분명히 알겠어. 나의 남편은 … 적어도…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해선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당신 … 참 불행한 남자라는 것을 알겠어. 적어도 우리 부부는 섹스를 하고 그리고 달콤하게 잠을 잘 수 있어.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겠어 … 이제 당신과 마지막이야.”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여자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간다. 남자는 침대 위에 떨어져 있는 황금빛 카드를 유심히 바라본다. 나는 여자가 다시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할 지도 모르는 부유한 남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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